무한히 넓은 우주, 무수한 별의 탄생과 죽음, 조금 확대하자면 한 성단, 더 확대하면 한 성계, 인류 문명이 부르는 말로는 제8성계의 중심에서 조금 벗어난 어드메쯤, 만약 이 우주를 동그랗게 뭉쳐 우주볼로 만들면 아주 미세한 현미경으로 확대해야 보일까 말까 한 곳에서 기갑 하나가 유랑하고 있었다. 탑승자는 '성인' 남성 인간으로 갓 독립한 여운에 잠겨 항로도 하루에 다섯 번씩은 재설정하고 눈을 뜬 순간부터 감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수련을 마다치 않았다. 가출 남아 루비싱이 아무리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왔다 해도 기갑이라는 보급이 제한된 환경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으니 가끔은 책을 읽고 쓰기도, 연구하기도, 이미 문제없는 기갑 내부를 개조하기도 지루한 날이 오기 마련이다. 아주 가끔.
기갑의 자동 순환 시스템이 불을 밝히고 아침을 선언한 어느 때, 루비싱은 멋들어지게 머리카락도 다듬고 스타일러로 다려진 셔츠 깃도 세웠다가 너무 꾸민 것 같아 단추를 두어개 풀어 헐렁하게 늘어뜨렸다. 좋은 아침! 오늘은 어떤 우주가 나를 기다릴까! 물론 이 망망대해의 우주에 관객은 없었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다 해서 기분이 상하진 않지만, 누군가 봐 준다면 더 즐겁지 않겠는가. 오늘은 정적인 행동을 해보자고 다짐해 신호가 잡히는 아무 서버의 백도어 암호 풀기 컨텐츠를 즐겨보기로 했다.
루비싱이 태어나기 이전에는 시뮬레이션 타이쿤류의 게임이 유행했었다. 플레이어가 신이 되어 직접 세계를 디자인하는 전능과, 그 세계 안에 들어가 자신이 설정한 세계 안의 캐릭터 중 하나가 되어 게임을 플레이하고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세계가 변하는 모습을 직접 즐길 수 있는 몰입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는 차별성으로 제법 인기를 끌었다. 이 게임은 원래 수도성을 제외한 나머지 성계의 도시계획사업의 하나로 개발된 베타 테스트에서 시작됐는데, 시장성을 확보한 여러 게임사가 뛰어들어 다양한 타이틀로 서비스를 시작했다. 작게는 우주 도시 하나를 생성하는 것부터, 우주 함대를 운용하거나, 더 나아가선 우주와 문명을 디자인하는 방대한 스케일의 게임도 나왔다. 후에는 온라인으로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방문할 수 있는 기능도 도입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그 중 가장 성공한 타이틀은 '플래닛 타이쿤'이었다. 물론 여느 유행이 그렇듯 타이쿤 장르의 인기는 반짝 뜬 후에 추락했고, 서버 종료 이후 회사 폐업 수순을 밟았다.
어떤 작품이 상업성을 잃고 서버를 내렸을 때도 여전히 그 세계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타이쿤 류 게임도 마니아들이 모여 한창 시절의 게임을 어설프게나마 구현한 프리서버가 알음알음 퍼지며 간혹 옛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는 이들이 접속하고, 관리자의 발길이 드문드문 끊기다가 정말로 사람들에게서 잊히곤 한다.
루비싱은 정체 모를 서버의 백도어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플래닛 타이쿤'의 프리서버 데이터를 발견했다. 당연히 온라인 접속은 불가능하고, 일부 파손된 데이터가 있어 누군가가 이미 만들어 놓은 우주 세계 내에서 퍼스트 퍼슨 플레이만이 가능한 상태였다. 자라온 환경 탓에 본의 아니게 고물 애호가가 된 루비싱은 자동 항로 탐색 기능을 키고 게임을 직접 플레이해보기로 했다. 시스템의 V기능을 키니 얇은 데이터막과 같은 인터페이스가 루비싱의 눈, 코, 입, 귀를 포함한 모든 감각을 덮었다. 레트로는 꾸준히 돌아오는 법이죠. 루비싱은 올드 컨트리 뮤직을 흥얼거리며 입장했다.
로그인.
인공지능이 청소한 듯 아주 깔끔하게 정돈된 방이 보였다. 생활필수품을 제외하고는 그 흔한 온실재배 화초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병동이라기엔 옷장이나 화장실 같은 기본적인 생활 가구는 갖춰져 있었다. 루비싱은 자신의 몸을 확인하려 했는데, 아마 서버가 본인의 모습을 확인하는 시스템은 구현하지 못했는지 팔이나 다리가 움직이는 정도만 확인할 수 있었고 화장실의 거울에 플레이어의 외형이 비치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어슴푸레한 윤곽에 플레이어의 ID가 보였다.
린林
아마 이 데이터는 누군가 플레이하던 기록 일부를 따왔는지 로그인 과정에서 ID를 설정하는 절차가 없었다. 우주는 곧 숲과 같아, 린林. 루비싱은 설정된 ID가 마음에 들었다.
얼핏 보이는 모습으로 자신은 제복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수많은 기갑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루비싱이 알고 있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대부분 타원형의 기체로 수납 가능한 것으로 보이는 발이 달려 있었고 겉면의 금속질은 육각 무늬를 이어붙인 형태로 기체마다 반사광이 달랐다. 루비싱이 기체의 표면을 살펴보고 있을 때, 벽면에 붉은 경고판이 여럿 뜨더니 오류 메세지를 출력했다.
경고. 경고. 1등급 위험 개체 다수 항계 외야 영역 침입.
동시에 엘리베이터 다수에 하나씩 불이 켜지고, 활동하기 편한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일렬로 나섰다. 루비싱은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었다: 첫째, 1등급 위험 개체는 무엇인가? 둘째, 이 항성계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자신이 있는 행성은 어디에 위치하며 각 행성의 형태는 어떠한가? 셋째, 그래서 나는 무슨 역할인가?
한 군인이 루비싱에게 보고했다. 장군님, 스피카 베타와 아크투루스 알파에서 출항한 것으로 추정된 외야 문명이 카이퍼 벨트로 항로를 트는 진운을 포착하였습니다! 루비싱의 의문점이 어느 정도 해결됐다. 1등급 위험 개체는 아마 외계 문명일 것이고, 항성계는 고대 지구 시대를 본땄으며, 나는... 장군이자 지휘자인 모양이네?
루비싱은 우선 이 기관-문명-행성에 통신 방어를 설정할 수 있는지 묻고 기갑에 올랐다. 통신 방어가 해제되기 전까지 외계 문명 출현에 대한 정보를 일반인에게 부분적으로 전달할 것이다(일반인이 있었다! 성간 전투에 미친 사람이 만든 우주는 아니었다.) 군인들은 루비싱을 따라 각자 기갑에 올랐다. 지금 보니 군복의 색깔이 옅은 군인일수록 난반사율이 낮은 기갑에 탑승했다. 루비싱의 기갑에는 두 명의 군인이 함께 탔고 카이퍼 벨트 방향으로 도약을 조절했다.
루비싱은 이 우주의 기갑 시스템을 흥미로운 눈으로 관찰했는데, 본래 자신이 알던 공간도약과는 달랐다. 우선 기갑의 연료를 사용해 행성에서 벗어난 후 근광속의 속도로 항해도를 따라 항해한다. 단지 속도가 아주 빠르므로 도약처럼 느껴질 뿐이다. 루비싱은 아마 우주의 개발자가 고대 시대를 최대한 재현하기 위해 역사책에나 등장하는 기술을 사용했다고 짐작했다. 타원형의 기체와 기체의 크기에 비해 작은 선실 또한 가속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중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디자인으로 보였다.
게임의 보정으로 편안한 도약을 즐기면서 시스템을 만지고 기갑을 구경하고 있는데 함께 들어온 군인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왜 그래요? 불안해요? 이런 일이 자주 있나요?
아... 아닙니다. 이런 일이야 자주 있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일단 그들과 통신을 시도해보죠. 그들이 꼭 위험하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저는 그게 아니라...
네? 괜찮아요, 편하게 말해요. 통신 가능 거리까지 10분정도 시간이 있네요. 긴급상황에 불려나오는 게 힘든 사정이 있나요? 스케줄은 조절할 수 있으니까 편하게 얘기하세요. 돌아가면 기숙실부터 좀 꾸며둬야겠어요. 그런 환경에 살면 사람이 당연히 피폐해지고 불편할 수밖에 없어요.
...아닙니다. 기지는 아주 좋고 레크리에이션을 위한 환경도 조성되어있어요. 다만 장군님이 좀...
이 우주기지의 설계자는 군인들의 심리 상태 유지에도 심혈을 기울인 듯하군. 기실 땅 위에서 나고 땅 위에서 자란 사람이 우주에 적응하기란 육체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쉬운 일은 아니다. 루비싱이 군인과 잡담을 나누는 동안 기갑은 카이퍼 벨트에 근접했고 근광속 엔진을 끄고 감속하며 외야 문명 함대와의 통신망을 연결했다. 타원형의 함대는 난반사가 강해 육각형이 반짝이는 기갑을 중심으로 갈수록 '어두운 빛'의 기갑이 둘러싼 채로 천천히 감속했다. 외야 함대는 두 방향에서 접근하고 있었으며 루비싱이 알던 세계의 중기갑과 같은 크기의 함대와 일인용 탐사기로도 보이는 작고 날렵한 모양의 함대로 구성되었다.
루비싱은 통신 문구를 입력했다: [우리 지구 문명은 역외 우주 문명에 우호적인 감정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어떤 목적으로 이 항성에 접근하였습니까?]
아까 대화하던 군인과는 다른 군인이 루비싱을 저지하는 제스처를 취했으나 이미 메세지는 통신망을 통해 전달된 후였다. 루비싱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고, 동시에 외야 문명으로부터 답신을 받았다.
[¾ð¾i¶o °IAº ¾ÆAO °·ACN ±a´EA ]
일찍이 장군님께서 자동 인지 통번역 시스템을 삭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루비싱은 한숨을 내쉬며, 시스템을 바라보았고, 감속하지 않는 함대와 번쩍이는 광선을 보았다.
로그아웃.
루비싱은 천천히 벗겨져 인터페이스로 돌아가는 V시스템을 느끼며 천천히 현실로 돌아왔다. 육각형이 결합한 타원형의 구세계형 기갑이 아닌, 신성력 우주의 자신의 기갑으로. 한쪽에는 작은 구형 온실이 조성되어 난초가 자라고 있었다(루비싱은 단 한 번도 난을 피우는 데 성공한 적이 없었지만, 시스템에 맡기지 않고 꾸준히 스스로 난을 키웠다.) 물을 한 잔 받아 마시며 린의 우주에 대해 생각했다. '린林의 우주'라는 명칭도 마음에 들었다.
강제 로그아웃이라면 아마 플레이어 루비싱, ID린이 사망했다는 의미다. 마지막에 본 광선은 외계 문명의 레이저 공격이겠지. 린의 세계에는 인간 문명만이 아닌 여러 문명이 있고, 기지나 군인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타 문명의 침범이 잦은 것으로 보인다. 일반인들의 거주구역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군사기지의 기술과 복지는 탁월하다. 우주 설계자는 고대 지구를 모티프로 여러 문명이 예상컨대 대립하는 우주를 설계했으나, 문명의 척도에 예상컨대 성간 전쟁이 나날이 빗발치는 "YOU DIED" 마니아는 아니다.
그러나 이전에 데이터를 남긴 플레이어는 확실히 통제광, 전쟁광이다. 이렇게 보면 군인들이 플레이어 루비싱을 대하는 이상한 태도도 설명되고, 역외 문명과 소통하지 않고 바로 함대를 투입하는 시스템을 구축해놓은 것도 납득이 간다. 루비싱은 이 남은 우주 데이터를 조금 더 살펴보기로 했다.
로그인.
루비싱은 함대가 미사일을 발포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제일 외곽의 육각형의 금속 입자가 회전하며 움직이자 그 안에서 소형 미사일이 튀어나와 역외 함대의 항로를 예측해 공격했다. 미사일을 발포한 함대는 선회하여 뒤로 빠졌고 난반사율이 높은 중앙 기갑들이 레이저로 역외 기갑을 노렸다. 루비싱은 공격을 당장 중단하고 싶었지만, 훈련된 루트대로 움직이는 기갑들을 아직 함대 운용 지식이 부족한 자신이 중단시키면 어떤 혼란이 벌어질지 몰라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루비싱은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기지로 돌아왔고, 군인들을 해산시키고 군사기지 내부 레크리에이션 센터와 상담심리센터 등을 둘러보다 기지 밖으로 나갔다.
놀랍도록 공기가 맑고 태양이 초목을 비추고 있었다. 기갑의 원통형을 반으로 자른 것 같은 탈것을 타고, 인공지능이 유도하는 인구밀집지역으로 향했다. 바닥은 깨끗한 회색 돌로 오물 한 점 없이 깔끔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군인들과는 달리 총천연색의 옷을 입고 근심이 없어 보였다. 건물은 모두 낮고 반듯하며 약 4-5층정도의 고층으로 올라갈수록 둥글었으며, 낮은 층에는 찻집이나 레스토랑 등의 쉼터가 위치했다. 마치 역외 문명의 습격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세상 같았다. 루비싱은 눈에 띄는 찻집에 들어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아주 투명한 유리벽 안으로 보이는 큰 난초 화분이 인상 깊었기 때문이다.
시뮬레이션 게임에는 전통적으로 여러 '선택지'가 존재한다. 이 장르가 처음 개발되었을 때는 플레이어의 모든 선택, 예를 들어 손가락을 굽히고 방을 나서거나 화장실을 가는 등의 작은 선택을 분석할 AI가 없었기 때문에 큰 갈래에 선택지를 두고 다양한 '엔딩'을 볼 수 있도록 유도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플레이어의 방향성을 분석할 수 있게 되어, 오픈월드형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선택지로 자리 잡고 엔딩의 방향을 결정한다. 물론 엔딩도 개발자가 세운 몇 가지 방향으로 국한되지 않고 수백 수천의 엔딩을 볼 수 있다. 인공지능이 자동으로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루비싱은 방금 자신이 전통적인 선택지를 잘못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비싱은 찻집에 들어가고 싶지만, 플레이어 루비싱은 '찻집에 들어가지 않는다'를 선택하고 탈것에 타 기지로 귀가했다. 고전적인 게임에서조차 스토리의 흐름이 바뀌는 큰 갈래에서만 선택지를 놓는다. 예를 들어 이전번 린의 우주에서 루비싱이 통신을 시도하느냐, 마느냐 같은 부분이다. 찻집에 들어간다, 들어가지 않는다는 선택의 축에도 들지 않는다. 루비싱은 아리송한 기분으로...
로그아웃.
아니, 이번엔 왜지? 로그인.
달리는 탈것 위에서 로그인한 루비싱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플레이어 루비싱 ID린은 고개를 숙이며 급하게 드리프트하고 투명하고 얇은 유리벽 위로 육각 금속을 재빠르게 덮었다. 탕. 총알 한 발이 유리벽을 스치며 지나갔다. 플레이어는 능숙하게 차를 운전하며 공감각 인터페이스를 열어 창밖에 보이지 않는 문제를 해결했다. 거대한 돔을 비추던 지도는 육각 금속이 벽을 모두 덮는 순간 지도와 저격수를 표시하고 인터페이스를 반원형으로 펼쳐 시야를 확보했다. 멀리서 과속하며 달려오는 다른 반-타원형 탈것들이 보였다. 금속 탄환과 금속 벽이 부딪히는 소리가 몇 번 공명했다.
기지 내부에서 군인 다섯이 탈것에서 내렸다. 익숙한 얼굴도 둘 있었다. 역외 문명을 숭배하는 종교적인 행동이 관측되었습니다, 당분간 불필요한 외출을 삼갈 것을 권합니다. 장군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의료 센터에 방문하시겠어요?
플레이어 루비싱은 총을 맞지도 않았고, 맞았지만 이전에 맞았고 아프지도 않았다, 몸은 멀쩡했지만 기지의 의료 센터가 궁금해 방문하기로 했다. 상황을 들은 담당자가 특이한 걸 보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장군님, 웬일로 방문하셨어요. 앞으로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주 방문해주셔야 해요. 사고는 후유증이 더 심합니다. 그는 루비싱의 눈에는 희미하게 보이는 왼팔과 목 뒤에 마그네틱 호스를 연결했다. 저번 정기검진도 역외에 계셔서 못 받으셨으니 전체적으로 검사를 한 번 할게요. 닥터가 말했다. 루비싱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지만 볼 수는 없는 이 손이 어떻게 생겼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로그아웃.
루비싱은 오감이 썰물처럼 쓸려나가는 인터페이스의 접힘을 느끼며 눈을 떴다. 이제 이 게임이 어떻게 설계됐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린은 역외뿐만이 아니라 항성계 내에서도 적이 있다. 아마 그 닥터는 정기검진을 빌미로 린을 죽이려 했을 것이다. 린의 싸늘한 기숙실과 자비 없는 공격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반복되는 린의 로그아웃이 루비싱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로그인.
플레이어 루비싱은 방 안에 난초를 들였다. 루비싱은 난초에 매주 물을 주고 매일 영양을 공급해주고 싶었지만, 머릿속에 자동으로 입력되는 린의 스케줄을 따르면 난초가 말라 죽기는 시간문제일 것 같았다. 한번 카이퍼 벨트 밖 역외로 탐색을 나가면 며칠은 돌아올 수 없었다. 루비싱은 난초를 데려갈까 생각했는데 보좌관이 기갑 내에 인간 외의 생명으로 규정된 물체를 들이는 건 금지됐다고 말했다. 그가 아깝게 입맛을 다시자 보좌관은 그 규칙을 도입한 게 린이라고 첨언했다.
기갑이 가속했다. 로그아웃. 결함으로 중력 보호 장치가 작동하지 않았다.
루비싱은 점점 린의 남아 있는 데이터를 따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로그인.
린은 방 안에 식물을 들이기 싫어한다. 하지만 플레이어 루비싱은 기어이 또 난초를 들였다. 들어가지 못한 찻집에 있던 것처럼 크고 예쁜 난초였고,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결함이 있던 기갑은 교체했다. 린은 관련 인물을 처벌했고, 플레이어는 자신이 이렇게 차갑게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점점 자신이 린의 안에서 린의 말과 행동을 하며 지켜보는 관찰자가 된 기분이었다. 역외 탐색을 하고 돌아온 날에도 난초는 죽지 않고 푸르게 피어 있었다. 잠을 자는 도중 온몸의 솜털이 서는 느낌에 눈을 뜨자 난 잎이 뒤집히며 반투명한 점액질이 새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푸딩같은 액질이 얼굴을 덮었다.
로그아웃.
로그인. 미사일에 남은 방사선에 노출되었다. 로그아웃.
로그인. 루비싱은 린의 우주가 돔 형태의 완벽해 보이는 도시와 어설프게 구성된 항성계가 전부란 걸 깨달았다. 린은 애초부터 이 우주 밖으로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엔진부가 폭발하며 기갑을 태웠다. 로그아웃.
로그인. 역외 문명의 언어는 어떤 시스템을 사용해도 통역할 수 없다. 송신한 데이터의 바이러스로 통신망 전체가 마비되어 기갑과 기갑이 부딪혔다. 로그아웃.
로그인. 역외 문명은 인간일 수도 있다. 린의 우주에서 그들은 제대로 설정되지 않았거나, 데이터가 소실됐다. 인간형 로봇과의 접촉. 로그아웃.
로그인.
로그아웃.
게임 속의 시간은 현실보다 빠르게 흘러간다. 루비싱은 뒤로 갈수록 서서히 플레이어로서의 자유의지를 잃고, 린의 선택대로 흘러갔다. 린은 매번 조금씩 더 오래 살았다. 루비싱은 수많은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겪었고 수많은 죽음을 감지했다. 린은 이 우주를 확장시키려 하고, 린의 우주는 그런 린을 죽이려고 한다. 이 우주의 빛원뿔 안에 있는 것은 끝없이 반복되는 운명이다.
퍼스트 퍼슨 플레이어 게임은, 특히나 시뮬레이션 게임일 때, 사람에 따라 강한 이입을 동반한다. 루비싱은 플레이어가 본인인 줄 알고 입장했으나 사실 루비싱은 타인이다. 그는 린이고 온실 속의 작은 화초림에서 기어코 온실을 벗어나 우주를 넓히려는 수풀이다. 그러나 루비싱은 린이 되었고 린의 눈으로 우주를 보았고 린의 촉각으로 기갑을 만졌다. 린의 죽음과 재시작을 느끼고 목격하고 사고했다. 루비싱은 린이 될 수 없었고 린의 선택에 미묘한 거리감을 느꼈지만, 그 이상으로 린에게 이입했다. 루비싱은 공감능력이 뛰어나다. 루비싱이 린에게 느끼는 감정은 자신보다는 멀지만, 타인보다는 가깝다.
루비싱은 수없이 죽음을 플레이하면서 린에게 더 나은 엔딩을 주고 싶었다. 모두가 즐겁게 잘 살았다는 동화적 해피엔딩이 아니어도 좋아. 그는 린이 린의 우주를 넓힐 수 있었으면 했다. 린이 난초의 꽃이 피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했다. 린이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으면 했다. 찻집에 들어가 차를 한 찬 우려 마실 수 있었으면 했다. 그가 단지 게임 속의 데이터일 뿐이라도......
린이 단지 게임 속의 데이터일 수도 있지만. 그는 플레이어일 때 여러 번 거울을 확인했다. 오감은 멀쩡한데 린의 모습은 감지할 수 없었다. 아마 린이 실제로 존재하는 우주 속 존재고, 자신이 그의 데이터 위에서 잠시 체험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루비싱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는 후반의 린이 게임의 버그가 아니라, 루비싱의 선택대로 움직이는 초반의 린이 데이터의 버그라면?
루비싱은 인터페이스를 덮고 린의 기록을 찾기 위해 데이터를 뒤졌다. 단순히 초반의 린이 데이터의 버그인 게 아니라, 데이터 전체가 문제였다. 플래닛 타이쿤 프리서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버려진 게임의 틀 안에 린의 우주라는 데이터가 덧씌워진 셈이다. 루비싱은 실제로 린의 우주를 체험했다. 루비싱은 이 데이터가 최초로 온 궤적을 추적했다.
닫힌 우주의 빛원뿔 안에 반복되는 운명이 있다. 이 우주는 투영된 홀로그래피로 이루어져 있고, 통신망의 미세한 틈으로 데이터가 흘러나왔다. 버려진 서버에 원뿔 안에서 반복되는 데이터가 흘러나와 바이러스처럼 침투했으며 루비싱이 체험한, 린의 우주라는 소우주를 형성했다.
말하자면 이 데이터는 무수히 반복되는 한 홀로그램우주의 과거-미래 빛원뿔의 시공간을 점입자가 스쳐 지나간 궤적이다. 세계점이 하나뿐이라면 그 근원을 추출해내기 쉽지 않았겠지만 특이하게도 이 우주는 같은 이야기가 무수히 반복되고 있고 데이터는 무한히 반복되는 이야기를 담았으므로, 세계선을 분석하다 보면 본 우주로 메세지를 보낼 수 있는 좌표를 찾아낼 수도 있다. 입자 데이터를 분석하면 그 세계선의 X축과 Y축은 매우 좁고 Z축의 궤도만 무수히 나열한 모양이 될 것이다. 이 우주는 공간보다는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는 극단적으로 닫힌 우주이며, 광입자가 수없이 되돌아가는 반복되는 이야기이다.
입자 데이터가 루비싱의 우주로 흘러들어왔다면 루비싱의 우주에서 입자 데이터를 보낼 방법도 있을 것이다. 이 빛으로 이루어진 세계선을 넘으려면... 광속을 초월해야 한다.
인류는 오래전에 광속을 침범했다. 기갑은 광속으로 충분히 항해할 수 있으나 인류문명이 땅에서 우주로 이동함에 따라 자연스레 교통정리를 위해 공간 도약을 도입했을 뿐이다. 재야의 고수인 루의 손에서 기갑은 약간의 개조만 거쳐도 광속으로 제 1성계부터 제 8성계를 넘어 외야까지 산책할 수 있고 그럴 능력도 된다, 다만 광속의 궤적이 나 여기 있소-하고 알려주는 꼴이 되어 당장 체포당하거나 포위당할 게 분명하니,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할 뿐이다.
그러나 인류는 우주의 절대 법칙을 넘을 수 없다. 특히나 인간은.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았고, 만약 시도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가 성공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고차원에서 질량이 없는 허수인 존재가 되어 인간성을 잃기 때문이다.
이 우주의 세계선과 린의 우주의 세계선이 겹치는 단 한 점 P에서, 루는 수일을 고심했다.
자신을 보낼 수 없다면 자신의 기억과 의지를 보내면 된다.
린의 세계선 데이터의 신호는 언제나 같은 곳에서 출발해 비슷한 부분에서 꺾어 다시 같은 곳으로 돌아간다. 루비싱은 자신이 게임에서 겪지는 못했으나 분석으로 얻은 출발 신호를 목적좌표로 삼았다. 전송할 데이터는 양자 이하로 수없이 압축해야 하므로, 감각을 담을 수 없고, 인지를 담을 수 없고, 명령과 감응을 위한 최소한의 초감각과 기억 일부만을 담아야 한다.
루비싱은 망망대해의 우주를 떠다니며, 초감각을 조립하고, 허수 공간을 제련했다.
데이터를 송신할 좌표도 수없이 확인했다. 타인보다는 가까우나 자신보다는 먼 그곳으로. 마지막 단계는 린을 플레이한 기억을 추출하여 입력 후 송신하기만 하면 된다.
자신이 린을 만날 수 있을 것도 아니면서, 루비싱은 괜히 수염을 깎고 거울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며 머리를 단장했다.
린, 솔직히 나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당신이 나의 모험심을 자극했어요. 난 당신의 해피엔딩을 보고 싶었다고요.
당신이 되는 기분은 놀라워요. 데이터가 보여주지 않은 당신의 삶과 생각과 인생을 더 이해하고 싶어요. 하지만 이 기억을 전송하면 나에겐 영원히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겠죠. 전 후회하지 않아요! 아마 이 버튼을 누르면 후회하거나 하지 않는 고민조차 잊어버릴 거예요. 아마 당신이라면, 이게 당신의 세계를 구하는 데 필요하다면 절대 고민하지 않겠죠. 후회할 선택도, 후회하지 않을 선택도, 그런 생각 자체를 자연스럽게 밀쳐낼 거예요.
저는 반쯤 당신이 되어 봤지만, 당신과는 달라요. 당신이 날 영영 볼 순 없겠지만 이렇게 꽃단장도 하고 있는데, 당신은 영영 이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점이 아깝네요! 하하하... 방금은 농담이었어요.
닫힌 빛원뿔 안에 있는 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이겠죠. 하지만 사람은 운명보다 강해요.
린, 잘 지내요!
루비싱은 버튼을 눌렀다.
초광속의 양자 데이터는 홀로그램에 비친 우주의, 린이 태어난 좌표에 도달했다. 데이터의 초감각은 린의 데이터를 인지하나 보거나 만지지 못한다. 무수히 반복되는 닫힌 시간선을 겪은 기억이 의지대로 흔들려 휘어지고 피어났다. 미시세계에선 방사형의 별 폭발과 같은 고차원 펼침이 일어났지만, 인간의 감각으로 인지할 수 있는 거시세계에선 여느 아이의 탄생과 같이 평안하다.
그러나 이 눈치챌 수 없는 양자장의 형성이 시간선의 궤적을 바꿔놓을 것이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오차는 우주 범위에서 수백 광년 후 대폭발을 일으키곤 한다.
양자의 유영 안에 사랑이 있다면, 그 인연의 찰나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불확실성에 기대는 아주 작은 기원이 담긴 봉화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반짝였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머나먼 우주 건너편의 별처럼.
우주의 법칙은 고요히 중립을 지킨다. 우주에서 발생하는 모든 우연은 가치판단을 습관처럼 하는 인간의 눈에선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현상으로 보인다. 어떤 일은 우연이 겹쳐 만들어낸 상상첨의 행운으로 느껴지고 어떤 일은 우연이 겹쳐 만들어낸 하하첨의 불운으로 여겨진다. 어떤 일은 필연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주는 언제나 중립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양자가 유영하는 모습을 인간은 볼 수 없다.
그리고 어느 날, 플래닛 타이쿤의 발견과, 린의 우주와, 린林을 모두 잊은 루비싱은, 베이징 베타성 부근을 유랑 중 아무런 표식도 없는 아름답고 정교한 생태선을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