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요?
15살 적 루비싱은, 참으로 평범한 중딩1이었다.
그 나잇대의 소년들과 비슷하게, 자라나는 자신의 자아에 도취되어 가끔 원인모를 기이한 행동을 하는... 소위 말하는 중2병. 루비싱도 그 격변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물론 루비싱은 나름 온순한 편에 속해있었기에, 미래의 자신이 과거를 조우했을 때 머리를 콱 박고 죽고싶어질 정도의 수치스러운 역사를 생성하지는 않았었다. 기실 중2병도 다양한 종류가 있는 법이었다. 루비싱과 같은 경우에는, 약간의 감성을 파는 쪽이었다. To 부정사를 한창 배우고 있던 영어 실력으로는 가사도 해석하지 못할 하이틴st 해외 힙합을 즐겨듣는 정도. 빈티지 스타일 옥스포드 노트를 부러 좍좍 찢어 하루하루의 일기를 기록하는 정도.. 그 정도의 귀여운 중2병이었다는 것이다.
루비싱이 다니던 중학교는, 불행히도 그의 집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뺑뺑이 운도 없지. 루비싱은 30분 버스를 타도 10분을 더 걸어야만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이어폰 꼽고 사색의 시간-을 보내기에는 버스만한 장소가 또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침 일찍 나오면 버스에는 사람도 없는 터라 더더욱 만족스러운 사색을 할 수 있었다. 교내의 분위기도 괜찮았다. 수업도 유익했고. 하지만 이런 학교생활에도 한 가지의 문제점은 있었으니...
루비싱은 그 날도 원대한 꿈의 등교를 위해 어김없이 집을 나섰다.
그의 집은 번잡한 도시의 외곽에 위치한, 대문이 달린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 작금의 시대에 단독주택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만은. 마당이라기에는 다소 민망한 짧다란 공간을 지나면 붉은 대문이 위치하고 있었다. 하복을 갖춰입은 채로, 흰 이어폰을 꼽으며 현관을 나서던 루비싱은 문득 한기를 느끼고는 당장 내일부터 춘추복을 꺼내입을 작정을 했다. 지구온난화 미쳤다. 계절에 중간이 없네. 성장을 겪고있던 루비싱의 감정기복만큼이나 기온이 널을 뛰던 시절이었다.
깨끗하지만 낡은 때가 조금 묻은 루 씨네의 주택대문을 나서면, 그 앞에는 새카만 주택 한 채가 있다. 루 씨 주택은, 붉은 벽돌로 쌓아진 곳이라 외관이 따듯한 편에 속했는데, 앞집은 새하얀 벽에 새카만 지붕을 얹은 구조라 언뜻 보면 깔끔한 아트갤러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단단히 잠긴 까만 대문. 대문은 열릴 기미가 없어 보였다. 대문을 나선 루비싱은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삭막하기 그지없는 앞집을 잠시 응시하다가, 이내 제 갈 길을 갔다. 왠지 그 딱딱한 살풍경 때문에 더 추운듯해서. 얇은 하복 옷깃을 괜히 여매며.
" 비싱! “
루비싱 15살 적에는 노이즈 캔슬링같은 고급기능이 탑재된 이어폰이 없었다. 루비싱은 편의점에서 빵 세개 먹을 값을 지불하고 구매한 싸구려 이어폰을 2년 간 사용하고 있었다. 그의 남루한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년 저스틴 비버의 목소리 사이로, 중년 남성의 낮은 목소리가 예고없이 불쑥 튀어들어왔다. 루비싱은 그제야 제 옆에 자동차 한 대가 섰음을 알아챘고, 약간 놀라며 이어폰을 빼냈다. 광이 나는 새카만 차체의 안에 든 사람은, 다름아닌 린웨이였다.
" 안녕하세요 아저씨. "
" 그래. 학교 가니? "
" 네. "
썬팅 짙게 된 차창은 그의 이미지와 퍽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로 말하자면, 그는 루비싱의 앞집, 그 새카맣고 삭막한 집의 주인되는 사람이었다. 린웨이는 루비싱의 부친과 인연이 있기도 했고, 게다가 집도 가까운 탓에(약 9m) 루비싱은 그와 어려서부터 자주 교류를 해왔었다. 하지만, 린웨이의 성격이 얼굴생긴것만큼이나 애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편이기도 했고. 최근 들어 루비싱이 격동의 중학생 시기에 돌입하며 세상 만사 사람들과 팔자에도 없는 낯을 가리는 중이었기에 둘의 관계는 극도의 어색으로 치닿고 있었다. 복슬복슬 젖살도 다 안빠진 중학교 2학년생과, 딱봐도 세상과 교류가 없어뵈는 중년 아저씨의 사이로 찬바람이 휑.. 불었다.
" 아.. 학교가 먼 곳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태워다 줄까? "
" 아.. 말씀은 감사한데, 오늘은 친구랑 같이 가기로 해서요. 죄송해요. "
" 아.. 그래? "
말을 할 때마다 어두에 붙어있는 '아..'가 그들의 미친듯한 어색함을 효과적으로 방증했다. 루비싱의 거절에 딸려온 사유는 입에 침도 안바른 거짓이었다. 이 외딴 지역에서 그 학교를 다니는 불행한 학생은 루비싱 하나면 족했다. 근데 어떤 헌신적인 친구가 등굣길에 루비싱의 지역까지 부랴부랴 와준단 말인가? 루비싱은 집을 나서며 약간의 한기를 느꼈었기에, 따듯한 차량에서 편히 등교할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해서는 매우 유감을 느꼈으나... 이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등교를 하는 것보다는 좀 추운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강렬히 들었다. 일생 청혼할 때와 맞먹을 정도의 용기를 가지고 친구아들에게 친한 척을 시도했던 린웨이 아저씨는, 장렬한 거절에 멋쩍게 뒷목을 긁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 샤오비싱은 따로 가겠다는구나. "
린웨이가 조수석을 보며 고저없는 목소리로 고지한다.
" 그럼 어쩔 수 없죠. "
루비싱은 순간 난데없이 머리에 벼락을 맞는 듯했다.
반만 내려간 새까만 차창 사이로 들리는 목소리는...
" 잘가, 샤오비싱. 공부 열심히 하고. "
조수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몸을 숙이며 창틈새로 얼굴을 비췄다. 창이 둘의 인사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린웨이는 그제서야 오, 하며 창을 끝까지 내려주었다. 창문은 세상의 모든 마찰을 무시하는 듯, 빠르게 내려갔다.. 루비싱은 한기에 결국 몸이 꽝꽝 얼어버린 것인지, 그 자리에 붙박이 되어 커다랗게 뜨여진 눈만을 깜빡일 뿐이었다. 창이 다 내려가서야 절세미인의 얼굴이 전부 드러난다. 어딘가 창백한 얼굴. 새까만 머리칼. 정갈한 차이나칼라의 교복...
" 자, 잠시만요! "
루비싱의 다시없을 첫사랑, 린징헝이었다.
다정도 병이라서
루비싱의 친구는 대관절 죽었다.
원래도 없던 존재이기는 했으나, 생겨난지 2분 만에 루비싱에게 부정을 당하며 죽었다.
당돌하게 린웨이의 원데이카풀 제안을 거절했던 루비싱은, 조수석에 그의 천년의 사랑이 들어앉아있음을 알아버리곤 당당하게 거절을 철회했다. 생각해보니까, 그 친구 오늘은 안온다고 했던 것 같아요!! 루비싱은 제가 생각해도 자신이 어이없어 뵌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간지에 죽고 간지에 사는 중학생들에게는 최고의 실패를 의미했지만... 알게 뭐람. 린과 같이 등교할 절호의 기회인데. 그렇게 루비싱은 린 가의 출근/등굣길을 함께하게 되었다.
-" ...기업과 ...의 유착 관계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당국의 입장은.. "
" 비싱, 즐겨듣는 노래 있어? "
" 응? 어, 있긴 한데... "
" CD가 몇 개 없긴 한데, 말해 봐. 있는지 찾아볼테니까. "
" 틀어주게? 하긴, 뉴스는 너무 따분하지. "
운전석에 린웨이. 조수석에 린징헝. 뒷좌석에 린징슈.
외관만은 출중히 냉혈한인 린씨 3인 사이에 끼게 된 루비싱은, 가슴따듯한 린 가 사람들의 호의에 당황했다. 이 삭막하기 따로없는 린씨들은, 루비싱과 인사를 나눈 후에는 대화 한마디를 나누지 않았다. 간혹 차량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에 일제히 고개나 끄덕일 뿐. 사회문제에 별다른 조예가 없던 중학생의 루비싱은, 린징슈의 말마따나 뉴스가 따분했다. 그리고 그 따분함은 루비싱으로 하여금 하품을 자아해냈는데, 그걸 린징헝이 우연히 포착한 모양이었다. 린징헝은 차량에 달린 씨디플레이어를 꾹꾹 누르며, 백미러로 루비싱과 눈을 마주쳤다. 이 다정한 사람아... 하지만 그 때의 루비싱은, 어린 아이로 취급받는 걸 싫어했기 때문에 이 어른 세 명(그래봤자 린징헝과 린징슈는 고2였다.)이 저를 배려해주는 것이 싫었었다. 중딩루비싱은, 객기를 부렸다.
" 뉴스 계속 들어도 괜찮아. 나 뉴스 듣는 거 좋아해. "
루비싱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루비싱은 똘망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꾹 올리고 있었다. 린징슈는 약간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품을 세번이나 하던데. 아침잠이 부족해서 그런건가. 린웨이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린징헝만은 고개를 돌려 루비싱을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웃음인지 확신할 수도 없을만큼 작게 웃음을 흘리곤 다시 씨디플레이어로 고개를 돌렸다.
" 내가 듣고 싶어서 그래. 그럼 그냥 내가 알아서 틀게. "
린징헝이 버튼을 몇 개 누르자, 뉴스가 줄창 나오던 스피커로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는 고심해서 스킵 버튼을 눌렀다. 노래나 댄스와는 그닥 친밀해보이지 않는 이 가족의 차량에는, 예상외로 들어있는 노래가 많았다. 한물간 발라드 가수의 댄스곡, 한창 유행하던 케이팝 아이돌의 EDM, 인기있던 드라마의 ost... 몇 곡이나 노래를 바꾸던 린징헝은, '어떤 노래'가 시작되고 나서야 버튼에서 손가락을 떼었다. 귓가를 울리는 익숙한 멜로디에, 루비싱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Justin Bieber - Boyfriend
린징헝은 노래를 틀고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듯이 다시 시트에 등을 대었다. 소년 저스틴 비버가, 사부작대며 스웩넘치는 랩을 내뱉었다. 너를 꼬시고 말겠다는 당찬 포부가 담긴 18살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어찌되었든 장담하건데 린씨 사람들 중 누구 하나도 즐기지 않는 장르임은 분명했다. 린웨이는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치며 리듬을 타는 것처럼 보였으나 유감스럽게도 누구도 그것을 즐긴다고 보지는 않을 것이었다. 루비싱은 그저 크게 뜬 눈을 깜빡거리며 조수석에 앉아 관심없는 얼굴로 노래를 듣고 있는 린징헝을 쳐다보았다.
린징헝은 알고 있었다. 루비싱이 무슨 노래를 좋아하는지. 최근에는 어떤 장르를 즐겨듣고 있는지.
사실 그것은 알고 있었다- 라기보다는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일 것이었다. 루비싱이 며칠 전 흘러가듯이 내뱉었던 것이니까.
루비싱은 갑자기 심장에 찌르르한 전율이 오는 것을 느꼈다. 훗날의 루비싱에게 왜 린징헝을 좋아했냐고 물어본다면, 감히 이렇게 말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다정도 병이어서. 다정도 병이라서 좋아하게 된 것이라고.
이프 아이 워쥬얼 보이프렌드.. 네버 렛유고...
내가 네 남자친구면 너를 절대 떠나보내지 않겠다.라는 미친듯한 자신감. 우리네 미덕은 겸손이 제일이라지만, 루비싱은 과도한 겸손보다는 자신감을 가지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한글자알파벳 세대였다. 연애에서 겸손떨어서 뭐할건데? 연애는 쟁취라구, 쟁취. 2차 성징도 오지않은 이가 내뱉는 사랑에 대한 역설은 매우 진취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애티튜드를 가진 것 치고는, 중학생 시절 루비싱의 연애 사업은 좀처럼 진행이 되질 않았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상상해보라. 당신이 좋아하는 이가... 린징헝이라면?
" 루비싱, 집중해. "
네엡..
린징헝의 일갈에 루비싱은 구부러져있던 척추를 단숨에 일으켜세웠다. 이런식으로라면 루비싱의 인생에 척추측만증이란 단어는 끼어들 틈이 없었다. 어떤 이에게는 거룩하기 짝이 없는 축복이겠으나, 정작 루비싱 본인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어서.. 루비싱은 교과서에 집중하는 척, 책상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손으로 괜히 펜을 놀렸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자신의 앞에 앉아 수학문제를 풀고 있는 린징헝에게 고정되어있었다. 함께 공부를 하자고 먼저 제안한 것은 루비싱이었는데도, 왜인지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은 린징헝 하나 뿐이었다. 당연했다. 루비싱은 애초에 공부 따위를 하려고 스터디를 제안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나란히 앉아 간식을 먹고. 수다를 떨고. 그러다보면 손도 잡고... 어찌되었든 공부가 스터디의 주요목적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루비싱은 이러한 속시꺼먼 의도를 담고 부탁을 했던 것인데, 린징헝이 누구란 말인가. 최소의 시간에서 최대의 효율을 뽑아내는 철혈의 고등학생. 개정판 성경을 네 개 정도 붙여놓은 듯한 어마어마한 사이즈의 고교수학기출문제집은, 테이블 위에 간식을 올려놓을 틈을 허락하지 않았다. 루비싱은 아련하게 린징헝을 바라보았다. 제도 샤프를 들고 숫자보다 그리스문자가 더 많은 수학공식을 써가며 문제를 푸는 린징헝.. 솔직히 형용할 수 없을만큼 멋있긴 했다. 루비싱은 한 번 더 그에게 반했다. 하지만, 씁쓸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루비싱. "
" 응? "
" 집중이 안 돼? "
" 아, 아니? 왜? 나 열심히 하고 있었어. "
" 너 지금 20분째 같은 페이지인데. "
헉.
루비싱은 깜짝 놀라 자신의 교과서를 뒤적였다. 진, 진짜네.. 전혀 공부하고 있지 않았음을 단숨에 들켜버렸다. 루비싱은 얼굴을 새빨갛게 불태우고 당황했다. 변명할 말이 없었다. 린징헝은 풀던 수학문제집을 덮고는, 반대편에서 한껏 허둥지둥대는 루비싱을 빤히 바라보았다. 린징헝은 루비싱이 채 걸음마를 떼지 못했을 적부터 그를 봐왔었다.(그래봤자 그 때는 린징헝도 대여섯살이었다. 그의 아동시절을 감히 상상할 순 없겠지만.) 그래서 린징헝에게 있어서 루비싱은 아주 어린 동생이나 마찬가지였다. 동년의 쌍둥이 여동생이 있기는 했지만, 그녀는 알다시피 매우 시니컬한 편이라. 린징헝은 유독 루비싱을 귀여워했었다. 그는 루비싱에게 잘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루비싱에게 신경을 기울였고, 그에게 다정을 나누어주었다. 그 다정에 루비싱은 형제애가 아니라 애먼 동성애를 키우게 되었으나... 린징헝은 루비싱을 바라보다, 이내 그와 자신 사이에 자리한 작은 테이블을 옆으로 치워 버렸다.
" 어? "
" 집중 안되면 나중에 해. "
" 그래도 돼? "
" 괜찮아. 시험기간 아니야. "
고등학생에게 시험 기간이 아닌 날이 어디 있겠냐만은, 동생에게 할애하지 못할 시간은 없었다. 린징헝은 테이블을 멀리 치워버린 채, 자신의 침대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쭉 뻗었다. 그리고는 제 옆자리를 손으로 작게 툭툭 쳤다. 이리 와, 샤오비싱. 그러면 샤오비싱은 또 쿵쿵거리는 심장소리를 죽인 채 얌전히 앉을 수밖에 없었다. 동생 속도 모르는 린징헝은 여상하게 질문이나 던졌다.
" 요즘 들떠 보이던데. 좋은 일 있어? "
" 좋은 일? 딱히 없는데... "
그저 루비싱이 린징헝 앞에만 서면 상기되니 들떠 보이는 것 뿐이었다. 그러니 좋은 일을 굳이 뽑으라면, 린징헝을 최근 들어 자주 마주쳤다는 것 뿐이겠다. 루비싱은 린징헝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린징헝은 아침 7시에 등교를 해 깊은 밤에나 귀가했으니까. 이렇게 주말에 스터디를 하는 것이 아닌 이상 일주일 동안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는 말이다. 루비싱은 이런 짝사랑하기 극악의 조건을 떠올릴 때면 투덜대고는 했다. 같은 나이였다면. 최소한 같은 학교를 다닐 수만 있었더라면. 이런 불가능한 상상이나 하며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었다.
린징헝은 제 옆에 앉은 루비싱을 빤히 쳐다보았다. 왠지 또 시무룩한 얼굴로(본인 때문이라고는 상상도 못하는 게 꽤나 괘씸하다.) 제 발끝만 보고있는 루비싱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린징헝은 유머 감각이 멸종된 저주받은 인간이었지만, 데이터 베이스는 이용할 줄 아는 21세기인이었다. 15세 남학생이 관심있어 할 만한 대화 주제에는 무엇이 있을까? 게임 - 루비싱은 게임을 별로 안 좋아했다. 루미큐브 같은 건 좋아할지도. / 공부 - 공부는 방금 공친 상태였다. 그리고 그닥 좋아할 것 같지도 않음. / 연예인 - 린징헝이 일자무식한 분야였다. 이 남자 초절정인기가수인 예브게니야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연애는?
린징헝은 생각했다 : 음... 그냥 물어보는 것 정도는 대화가 가능할지도.
" 좋아하는 사람은 있어? 중학생들도 연애 많이 하잖아. "
(어떻게 이렇게 동생 마음 후벼파는 선의만 골라 저지를 수 있지?)
린징헝은 아무 생각없이 말을 내뱉고는, 아무 생각없이 고개를 돌렸다가, 충격받은 루비싱의 얼굴을 마주했다. 루비싱이 린징헝의 '그' 질문을 듣는 과정은 이러했다. '좋아하는' 까지는 형의 말을 경청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사람은' 이라는 어구가 나오며 잠시 혼란을 겪었다가, '있어?' 라는 의문문을 들음으로써 충격에 빠졌다. 물론 린징헝은 몰랐다. 이 새파랗고 귀여운 동생이 저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루비싱은 너무나 커다란 충격-상심을 받았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질문을. N년 째 아련한 첫사랑에 시달리고 있는 나에게 이런 질문을. '그런' 질문을 듣고 명쾌하게 자신의 좋아하는 사람을 줄줄 토로할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루비싱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그 질문한 사람 본인이 그가 짝사랑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루비싱은 억울함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안그래도 짝사랑하기 팍팍한 조건을 가진 그였건만. 상대조차 이렇게 팍팍하게 굴어준다니. 루비싱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이내 억눌린 한숨을 내뱉듯 대답을 했다.
" .............. 있어. "
린징헝은 '그' 질문을 던진 이후, 오히려 컨디션이 나락으로 가버린 루비싱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린징헝이 누군가의 눈치를 볼 것이라고. 그는 아직 고등학생이었지만, 그가 지나가면 무당도 작두에서 떨어질 것이 안봐도 OLED였다. 그런 린징헝이, 루비싱의 우울한 기분을 풀어보려 잡다한 질문을 던져대는 것이었다.
" 오. 몇 살인데? "
" .... 나보다 많아. "
" 음, 같은 학교야? "
" ...... 아니. "
" 음... 자주 만나는 사이인건가? "
" ........ 자주 못 만나고 있어. "
" 으음.. "
힘들겠는데...
연애에 일자무식한 린징헝도 힘들겠다는 판단을 내릴 정도로 각박한 사정이었다. 그 상대가 본인일 줄은 꿈에도 모를테니, 결국 루비싱 속만 기름 부어진 불난집이 되었다. 당신입니다. 당신이라고. 린징헝은 루비싱을 위한 조언이 무엇이 있을지 생각해보다가, 이내 진로를 틀어 그에게 해줄만한 격려가 무엇일지 고민했다. 번듯한 친구 하나 없는 그가 조언은 무슨 조언. 루비싱은 린징헝이 생각하는 모습을 보고는 마음이 꼬인 실타래처럼 복잡해졌다. 그의 시야로, 길게 뻗어져있는 린징헝의 다리가 보였다. 그의 다리 옆에는 루비싱의 다리가 나란히 뻗어져 있었다. 성장통을 겪을 새도 없이 항상 길쭉함을 유지해왔던 린징헝은 고등학교 입학 이후 180을 훌쩍 넘겼다. 그에 비해 루비싱은 또래들보다도 약간 작은 축에 속해있었다. 이것조차도 루비싱에게는 너무나 야속했다. 루비싱은 울컥해서, 린징헝이 무언가 또 악마의 질문을 내뱉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 형은, 좋아하는 사람 있어? "
있을 리 없었다. 그 속을 알 수 없는 린징헝이었지만, 이것만은 확실했다.
" 있지. "
린징헝의 간결한 대답에 루비싱은 또 한 번 정수리에 벼락을 직격으로 맞았다.
뭐?
뭐가 있어?
" 거, 거짓말. "
" 뭐가. "
" 거짓말하는 거지, 지금? "
루비싱은 당황했다. 당황하다 못해, 약간의 두려움마저 들었다. 린징헝이 대답하고 난 후 불과 몇 초 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루비싱의 머릿속으로는 온갖 생각이 피어올랐다. 중학교 2학년의 시선에서 보자면 고등학교 2학년생이란 너무나도 큰 존재다. 린징헝의 '그 사람'의 이미지가 루비싱의 머리에서 빠르게 만들어진다. 그는 키가 크고, 지성인이며, 루비싱처럼 수다스럽지도, 머리카락이 개털처럼 흩날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뉴스를 즐겨보며, 시사교양을 즐기고, 매우 쿨할 것이다. 그야말로 린징헝과 맞춤처럼 어울리는 사람이다. 루비싱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쭈욱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 안 돼... "
" 루비싱, 제대로 얘기해야 내가 들려. "
" 안되는데... "
린징헝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루비싱이 고개를 숙인 채 웅얼거리는 탓에 말의 내용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린징헝은 허리를 숙여 루비싱과 시선을 맞추려 했다. 린징헝이 자신을 바라보려고 한다는 것을 알자, 루비싱은 억울해져서 고개를 바짝 처들었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빽, 외쳐버렸다.
" 안된다고! 형, 고, 고등학생이잖아! 대학 안 가!? 무, 무슨 연애야! "
고등학생 앞에서 함부로 주워섬겨서는 안되는 주제, 부동의 top1. 입시 이야기를 꺼낸 루비싱은 어째선지 도리어 본인이 더 울망해보였다. 린징헝은 갑자기 루비싱이 자신에게로 훅 다가오자, 기껏 숙였던 상체를 다시 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린징헝은 콕 찌르면 터질듯한 루비싱의 눈망울을 빤히 쳐다보았다. 비싱이 내 대학에 원래 이렇게 관심이 많았나? 린징헝은 자신의 대입과 루비싱이 무슨 긴밀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는지 잠시 생각해봤다. 루비싱은 그 잠깐의 간격에 간장이 다 녹는 듯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는 린징헝과 그의 우아한 애인이 웨딩 마치를 올리고 있었...
" 무슨 연애야. 내가 말한 건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지. 샤오비싱, 징슈, 루신, 부모님, 뮐러... "
린징헝은 루비싱이 무슨 오해를 했는지 깨달았고, 김빠지는 숨을 한 번 내쉬며 별 거 아니라는 듯이 말을 늘어뜨려놓았다. 요지는 그런 것이었다. 성애라기보다는, 소중한 사람들을 가리켜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뭉뚱그려 말했던 것이다. 루비싱에게 있어서는 꽤나 안도될 일이었지만, 그는 왜인지 얼이 쏙 빠져나간 듯 보였다. 실제로 린징헝의 지나가는 듯한, 그런 가벼운 대답을 들은 루비싱의 정신은 우주선을 타고 안드로메다를 향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지, 샤오비싱...좋아하는 사람이지, 샤오비싱...
이거 쌍방이라는 소리?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루비싱은 린징헝의 그런 가벼운 대답만으로도 주먹만한 심장이 세차게 뛰어대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루비싱은 무릎을 끌어모으고는 냅다 이마를 다리에 처박았다. 꽁. 루비싱이 갑작스레 이상행동을 보이자 린징헝은 다시 한 번 놀랐다. 오늘따라 루비싱의 상태가 이상한 듯 보였다. 루비싱은 자신을 따라오는 린징헝의 시선을 느끼며 생각했다. 다정은 병이다. 확신할 수 있었다.
" 형... 연애 안하면 안 돼? 결혼도 하지말고, 그냥 나랑... "
" .... "
" 나랑... "
루비싱은 고개를 살짝 돌리고는 말꼬리를 잔뜩 잡아늘이며 작게 이야기했다. 그 때 루비싱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지금 와서 돌아보자면 정말 헛소리였다. 갑자기 3살 어린 동생에게서 난데없이 비혼비연애 권유를 받은 린징헝은, 당황도 않고 그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었다. 그니까, 나랑...
똑똑.
벌컥!!
" 아들래미들!! "
우와악. 의식의 흐름에 입을 맡겼던 루비싱은, 문이 쾅하고 열리는 소리에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고 입을 다물었다. 청천벽력이 따로 없었다. 겉치레가 되어버린 노크소리는, 뒤이어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비하면은 데시벨이 터무니없이 작았다. 린징헝은 미간 사이를 살짝 좁힌 채로 문전에 나타난 루신을 쳐다보았다.
" 오전인데 생기가 넘치시네요. "
" 공부한다더니, 너희야말로 꽤 생기가 넘쳐보이는데? 원래 공부하면 기력 쪽쪽 빠져나가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런 뻥쟁이들이 다있나. "
" 고효율에는 휴식이 필수에요. "
" 그래 우리 아들 짱. 점심 먹자! 뮐러는 스시가 먹고싶다는데, 너희는 어떠니? "
루비싱은 눈망울을 적시던 눈물이 쏙 들어감을 느꼈다. 루신은... 쾌남이었다. 린웨이와 허물이 없기로서니 현대미술관에 버금가는 린 가네 하우스에 성큼성큼 들어와 산통을 다 깨버릴 수가 있는 것이었다. 자연광 들 일 없는 실내가 왜인지 루신 한 명 들어온 것만으로 후덥지근해졌다. 루비싱은, 한 편으로는 마음이 편해지기는 했으나, 산통은 다 깨버리고 린징헝과 티키타카 중인 루신을 보자니 어딘가 짜증이 솟구쳤다. 아, 아빠 나가라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한마디 말하지 못하고, 다시 쑥쓰럽고 까탈스런 중2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청천벽력은 루신의 등장으로 끝이 아니었다.
점심을 먹으러 나가기 위해 옷을 챙겨입던 루비싱의 귀로, 루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신은 잘 정돈된 린징헝의 방을 한바퀴 둘러보고 있었는데, 문득 그의 시야에 사로잡힌 것은, 린징헝의 책상 위에 놓인 책 한권이었다. 두껍디 두꺼운 책의 표지 위에는, 영어로 된 글자가 큼지막히 적혀있었다...
" 아 맞다, 샤오징헝. 유학 준비한다더니, 그건 잘 되고 있어? "
?
" 아... 어머니께서 미국 쪽으로 권유를 해주셔서. 아마 그 쪽으로 가게 될 것 같아요. "
..........
루비싱은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아니, 반쯤은 정신을 잃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루비싱의 연애 사업이 기를 못 펼쳤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루비싱은 울고만 싶었다.
나이와 학교를 초월하는, 초대형 장애물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린징헝과 자신의 사이에 약 9000km의 장애물이 생길 것이라고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짝.낳.괴 in the Beijing
집념이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집념으로 이루어낸 역사는 과연 얼마나 될까? 현재의 루비싱이 과거의 그를 평가해보자면 이렇게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저... 말인가요? 저는 아마... 짝사랑이 만든 망념이겠죠...
루비싱은 울었다. 그 날, 린징헝이 유학을 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처음 안 그 날도 눈물을 터뜨렸고, 린징헝이 유학가기 전 날밤까지 꾸준히 베갯잇을 적셨으며, 린징헝이 유학길에 오르는 당일 공항에서도 울었다. 물론 그의 소중한 린이 마음을 쓸까봐 그의 앞에서는 감히 못 울었다. 중학생 가오는 신경도 쓰지 않고 공항 화장실에 들어가 엉엉 울었다.
린징허어엉 내가 내가아아 당신을 얼마느아아 헉흑 어떠케 당신이이
화장실 간다며 자취 감춘 아들래미를 앞에서 20분 간 기다려야했던 루신만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20분간 대성통곡을 하고, 시뻘개진 눈으로 화장실을 나온 루비싱은, 잔뜩 당황한 자신의 아버지에게 선언했다.
' 나도 유학갈래. '
도피성 유학도 아니고. 짝사랑성 유학은 아마 신개념일 것이었다.
중학교 2학년생, 167.5cm의 루비싱은 정말 무럭무럭 컸다. 루비싱은 약간 얕잡아봤던 미국대학 입학이 그렇게도 힘들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공부에 매진했다. 버섯 씹어가며 공부하는 루비싱을 보며 친구들은 혀를 내둘렀다. 사랑에 미쳤다. 저자식은 사랑에 미쳤어. 루비싱은 정말 사랑에 미친놈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이후, 루비싱은 정말 죽순 자라나듯이 폭발적으로 신체의 크기를 키웠다. 마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올라간 키작은 인간처럼, 온몸의 관절이 빠질것같이 저린 성장통을 느끼며, 루비싱은 침대위에서 눈물을 찔끔였다. 그래, 차라리 왕창 아프고 쭉쭉 커라. 190까지 커라. 린징헝보다 크게. 린징헝보다도 훨씬 크게. 유학길에 오른 이후, 귀국 한 번을 안하는 린징헝이 원망스러웠다. 서부로 갔다는데. 다국적 친구들과 서핑을 즐기면서 다른 사람에게 부탁받아 태닝오일을 발라주게 되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루비싱에게는 가슴 졸이며 성장통을 감내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차라리 지금이었다면 연락이 쉬웠을 것이었다. SNS가 활성화되어있는 것은 물론이고,(물론 린징헝이 SNS를 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해외에 있는 사람과 연락하는게 그닥 까다롭지 않았으니까. 글로벌 세계라지 않은가. 멀리 있어도 이렇게까지 단절되어있는 느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단절된 채로 4년을 떨어져있었으니, 애정이 식을만도 하건만. 루비싱이 이 눈물나는 순정을 지킨 데에는, 저 머나먼 캘리포니아에서 날아온 우편물도 한몫을 했다.
샤오비싱에게.
아무런 수사없이 투박하게 쓰인 편지를 읽으며 루비싱은 편지조차 참 린징헝답다라는 생각을 했다. 해외우편은 아무래도 비용이 부담스럽기 때문에, 편지가 자주 오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은 꼭 도착하는 편지는 루비싱의 짝사랑에 간헐적으로 장작을 지펴주는 계기가 되었다. 린징헝은 간지러운 미사여구에 능한 사람이 아니었다. 수기로 쓴 그 몇 줄은 분명한 애정이었다. 루비싱은 그 한장짜리 편지를 계속해서 보다가, 책꽂이 사이에 껴두며 다시금 단단히 다짐했다.
미국 무조건 간다!
다짐을 한 이후의 시간은 강의 상류처럼 빠르게 흘렀다.
막연히 린징헝의 족적을 따라 경영학으로 빠지려 했던 루비싱은, 물리를 접한 것을 계기로 기계의 매력에 흠뻑 젖어들게 되었다. 어렸을 적 RC카 좀 분해해봤던 루비싱은, 뒤늦게야 자신의 흥미를 깨닫고서는 공학으로 진로를 완전히 틀게 되었다. 늦게 입문한 덕분에, 그려왔던 유학은 1년이 더 미뤄지게 되었다. 표면상으로 재수나 다름없는 해를 보내며, 해외 힙합을 듣던 중2 소년은 난데없는 메탈리카에 빠지게 되었다. 역시, 힙합도 좋지만 음악은 헤비메탈이죠. 빠지게 된 경로조차 불분명한 그의 플레이리스트는, 어느덧 레드제플린부터 블랙 사바스까지, 메탈이 지배하고 있었다. 걸쭉하게 짚어지는 너바나의 선율은, 이전의 저스틴 비버와는 확실히 괴리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어찌되었든, 중2 소년은 자랐고, 팔다리가 비교할 수 없이 길쭉해졌으며, 캘리포니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린징헝은 이미 졸업을 하고 제 일을 해나가고 있는 중이었으나, 루비싱은 상관하지 않았다. 린징헝을 따라 그가 졸업한 대학에 입학할 예정이었고, 무엇보다도.
루비싱이 미국에 있으며 거주하게 될 집이, 바로 린징헝의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1233, Cherry St,San Carlos, CA…
메일함에는, 평소 심심치않게 볼 수 있는 루신의 메일 주소(papas.moutainlove@mail.com) 대신, 뮐러(Mulle.r.@mail.com)의 것이 상단에 떠있었다. 그녀의 메일에 적힌 글은, 문체에서조차 우아함이 묻어나왔다. 메일은 짧은 안부인사와, 모쪼록 신세를 지게된 루비싱을 잘 부탁한다는 내용이 담겨져있었다. 린징헝은 예의상의 짧은 답신을 전송한 후, 노트북을 닫았다. 오후 4시. 슬슬 동거인이 도착을 할 시간이었다.
린징헝은 소파에 가만히 기대앉았다. 캘리포니아, 샌 카를로스, 체리 스트리트, 1233. 린징헝이 6년 전 입주한 이 주택의 가구는, 6년 동안 단 한 번도 바뀌지 않고 제자리를 지켰다. 그것은 린징헝이 당장 앉아있는 소파도 마찬가지였다. 푹신한 시트를 자랑하는 소파는, 6년간 사용했으면 푹 꺼질만도 하건만 아직까지도 사용감조차 들지 않아 새것만 같았다. 그럴만도 했다. 린징헝은 이 집에 들어오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 사람이, 소파에 앉아 TV나 시청하며 휴식을 즐겼을 리는 만무했다.
오랜만에 집 안을 지키고 앉아있게 된 린징헝은 어딘가 마음이 불편했다. 불편했다? 불편했다라기보다는... 사실 린징헝도 제 마음을 정확히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6년 간 루비싱과 주고받은 편지는 자그마치 50 여 통에 달했다. 메일을 쓰기 전까지는 달에 한 번은 보냈으니까. 그간 소식이 끊겼던 것도 아닌데, 직접 얼굴을 보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매우 미묘했다. 말하자면 린징헝은 싱숭생숭했던 것이다. 6년만의 재회가.
린징헝은 가전 돌아가는 작은 소음 속에서, 짧은 시간 약간의 후회를 했다. 그는 6년 간 너무나 바빴다. 입학, 재학, 졸업, 그리고 바로 시작된 일. 뭐가 그리도 바빴던 걸까? 6년이라는 그 긴 시간 동안, 잠깐 틈을 내 고향에 다녀오는 것이 뭐가 힘들었던 걸까? 린징헝은 답지 않게 상념에 잠겼다.
쿵쿵.
린징헝은 살짝 놀라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인종이 있을텐데? 6년 간 간헐적으로 귀가했던 남자가, 자신의 집 초인종이 고장났으리란 걸 알 리는 없었다. 린징헝은 얇은 슬리퍼를 끌며 현관으로 나섰다. 중문과 겉문의 유리면 너머로, 길쭉한 실루엣이 보였다.
" ... 루비싱? "
린징헝은 반신반의하며 문을 열었고, 이내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징헝! 아니, 린? 뭐라고 불러야 하지? 너무 오랜만이야! "
집안 살림을 다 꾸려온 듯한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옆구리에 낀 루비싱이, 숙였던 허리를 펴며 린징헝에게 웃어보였다. 한 번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는 비행 일정이기에, 피곤할 법도 한데. 루비싱은 피로 따위 개의치 않는듯, 발갛게 생기가 도는 얼굴로 린징헝에게 환하게 웃어보였다. 린징헝은 제 가슴팍에 오던 15살 소년이, 한순간에 자라버린 것을 보며 약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런 그가 내뱉은 첫마디는 가히 새로운 것이었다.
" ...너, 언제 이렇게 컸어? "
캘리포니아, 샌 카를로스, 체리 스트리트, 1233.
현관을 사이에 둔 두 남자의 재회는 그랬다.
들뜸과 경악, 그 사이의 미묘한...
( ).
기억하세요. 준비물은 넷플릭스, 나초, 그리고 살사소스.
Netflix and chill?
나랑 넷플릭스 보러 갈래?
표면적으로 보자면 너무나도 문화향유적인의 이 말의 뜻은, 사실은 굉장히 섹슈얼하다.나랑 잘래?아니- 잠깐, 난 네게 성적으로 관심이 있어- 이 말을 대체 왜 떠오르는 뉴미디어 플랫폼을 이용해서 어필하는 건데? 넷플릭스는 그냥 이용당했잖아?
덩치로 보나 외모로 보나 훌륭한 남성인 루비싱은, 뻔뻔한 생각이지만 스스로도 느낄 수 정도로 꽤나 인기가 좋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뭐 어쩌란 말인가? 그는 게이인데. 심지어 6년간 맞사랑도 아닌 짝사랑의 지조를 지켜온 소나무같은 게이였다. 동기 여학생의 '자신의 집으로 넷플릭스 보러 가자'는 제안에, 흔쾌히 따라가서 열심히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를 정주행하고 온 게이였다. 그 날 밤은 건전하다 못해 감성이 넘치는 시간이었다. 라라진의 연애일기를 보며 루비싱은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다음날 캠퍼스에 가니 루비싱이 차이니즈 게이라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아있었다. 소문에 대한 루비싱의 반응은 심심했다. 넷플릭스 보자는 말에 그런 음험한 의미가 있었다니, 넷플릭스와 약간의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만 했을 뿐.
그 즈음은 루비싱이 린징헝과 동거하기 시작한 지 약 4개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4개월 동안의 동거. 루비싱의 6년 간의 기다림은 결실을 맺었을 것인가? 안타깝고 답답하게도, 그의 연애사는 항상 순탄히 풀린 적이 없었다. 루비싱은 몰랐다. 린징헝이 이렇게까지 일중독인 줄은. 6년 간 기다려서 태평양을 건너 왔는데도, 그는 린징헝을 기다리는 처지였다. 루비싱이 린징헝에게 문자를 보낸다. '징헝, 늦어?' 그러면 30분 쯤이 지나서야 답장이 왔다. '못 들어갈 것 같아.'
약 60평의 단독 주택. 중국 주택에 있던 마당의 네 배는 되는 마당이 현관 앞에 펼쳐져 있다. 그리고 마당의 끝에는 오렌지 나무가 한 그루. 루비싱은 이 체리 스트리트 위, 주택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생각했다. 푹신한 소파는 루비싱의 몸에 맞춘 것마냥 편안하다. TV에는 루비싱이 그 날 울면서 봤던 내사모남이 흘러나왔다.
루비싱은 더이상은 기다릴 수 없었다.
< < 징헝
11.06.WED.
1 징헝
1 내일 나랑 넷플릭스보자
시답잖은 낯을 가리던 열다섯 시절과, 9000km의 벽이 있던 과거로부터 지금이 차별화된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점이었다. '넷플릭스를 보자.'라니... 같이 스터디 하자,도 아니고. 같이 넷플릭스 보자, 라니... 말하자면 그런 것이었다. 루비싱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플러팅'을 치고 있었다!
린징헝이 '넷플릭스 앤 칠'의 함의를 알고 있을까? 대답은 No.였다. 루비싱의 예상대로 린징헝에게서는 순순히 답장이 왔다.
내일? 내일은 안될 것 같은데.
하여튼 한 번에 제대로 넘어가는 법이 없다.
모레. 돼?
명랑하게 울리는 알람. 루비싱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답장을 보냈다. 모레, 선약이 있더라도 취소해야했다. 11.08.FRI의 플랜이 추가되었다. : '린징헝과 넷플릭스 보기'.
11.08.FRI. PM 4:34
" 루, 그러지 말고! 진짜 안갈 거야? "
루비싱은 단호했다. 프레스콧은 한치의 망설임없이 가방을 싸는 루비싱을 못마땅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루비싱은 세상 만사 관심이라고는 로봇에 몽땅 쏠려있는 이상한 놈이었다. 치어리더부 에이스로 유명한 케이티의 집에 가서 진심으로 넷플릭스만 보다 나왔다는... 어딘가 진짜로 이상한 놈. 아니면 어딘가 기능을 하지 못하는 놈. 오늘도 같은 과에서 인기가 많기로 유명한 동기의 집에서 파티가 열린다는데, 루비싱은 귀가하기에 급급했다. 집에 사탕이라도 숨겨놨냐고, 저 이상한 놈! 유감스럽게도, 프레스콧의 생각은 어느 의미로는 맞는 것이었다. 그게, 사탕이 아니라 사람이 있어서 그렇지.
루비싱은 평소 린징헝의 도움으로 매입한 중고차를 타고 통학을 했다. 차를 타고 20분이면 집에 도착했지만, 어째서인지 그 날만은, 학교에서 집까지 15분도 채 걸리지가 않았다. 들뜬 마음에 과속을 했다. 그 날은 범법이라는 단어의 어감조차도 붕 뜬 구름만 같았다. 루비싱은 자신의 호르몬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엔돌핀이 마구 돌고,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항상 아무도 없는 빈집으로 귀가해야 했던 루비싱은, 중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거실의 불빛에 환하게 웃었다. 징헝, 왔어? 어, 일찍 끝나서.
" 뭐 볼래? "
" 글쎄. "
" 이 집 티비에서 넷플릭스 서비스한다는 거 알고는 있었어? "
" 알긴 했는데. "
" 어련하시겠어. 하기야, 예전에 예브게니야도 몰라서 놀림 받았잖아. 아빠한테. "
루비싱은 커다란 봉지 안에 든 나초를 그릇 위로 떨어부으며 킥킥 웃었다. 린징헝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루비싱을 돌아봤지만, 그다지 기분이 나빠보이지는 않았다. 살사소스를 붓고 음료수까지 품에 안은 루비싱은 린징헝이 앉아있는 소파로 걸어갔다. 린징헝은 아무 의미없이 넷플릭스의 화면으로 리모콘으로 빠르게 넘겨보고 있었다. 형형색색, 다양한 장르의 미디어들이 트럼프카드가 섞이듯 돌아간다. 루비싱은 린징헝에게서 리모콘을 앗아들며 화면을 천천히 돌렸다.
린징헝과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나 '키싱부스'를 함께 볼 생각은 감히 들지 않았다. 하지만 심각한 내용의 다큐멘터리는 분위기가 깨질 것 같았다. 루비싱은 당시 넷플릭스의 부동의 인기 1위를 자랑하던 '기묘한 이야기'를 틀었다. 화면 위로는 넷플릭스 심볼이 띄워지며, 영상의 시작을 알렸다.
루비싱이 린징헝에게 '넷플릭스를 보자'고 제안했던 것은, 세간에 통용되는 그런 야릇한 함의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루비싱은 그저 가까운 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또다른 관계의 진전을 꾀하고 싶었던 것 뿐이었다. 어찌되었든 본목적이 넷플릭스를 '보는 데'에 있지 않다는 것만은 같았지만.. 마치 6년 전 루비싱이 공부를 목적으로 린징헝에게 스터디하자고 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상대는 루비싱의 목적에 쉽게 리드되어오지 않았다. 린징헝은 의외로 영상에 집중하고 있었다. 린징헝이 이런 초자연적 현상을 다룬 드라마에 흥미를 두고 있는 줄은 몰랐다. 린징헝은 자세가 불편한지 몇 번 몸을 뒤척였지만, 그의 눈동자는 커다란 TV화면 속에 못박혀 있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루비싱은 몇 번 나초를 집기 위해 린징헝과 손이 부딪힌 것 외에는, 그와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루비싱은 속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또?
이렇게 이 시간을 보내버린다고?
루비싱은 더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는 결단을 내렸다. 린징헝의 집중이 깨지는 것은 안타까우나, 그에게 말을 걸기로. 이조차도 6년 전과 마찬가지였다. 린징헝의 집중을 흐트리는 것은, 루비싱이었다. 루비싱은 화면에서 린징헝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 징헝. " / " 비싱. "
루비싱은 살짝 놀라 눈의 크기를 키웠다. 린징헝은, 루비싱이 자신에게 말을 붙여올 줄은 몰랐는지 살짝 눈썹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들은 동시에 서로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서로 놀랐다. 드라마에 집중하고 있는 것 아니었나? 루비싱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린징헝 쪽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린징헝에게 먼저 말하라는, 양보의 제스처였다. 린징헝은 살짝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루비싱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윌에 대해서 안대!
TV에서는 한창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루비싱의 귀에 스피커 소리는 닿지 않았다. 린징헝이 저를 빤히 바라만보고 있자, 루비싱은 어딘가 가슴이 콕콕 찔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왜 아무 말도 안하지? 왜 나를 쳐다보는 거지? 하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다분히 애를 썼다. 린징헝의 눈동자는 여전히 루비싱을 응시할 뿐이었다.
린징헝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비싱, 그런데 너 말이야. "
루비싱은 침을 한 번 삼키는데, 목이 너무 아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왜 이제 나를 형이라고 부르지 않아? "
린징헝의 입에서 나온 말은 또다시 예상치 못한 새로운 것이었다. 루비싱은 그저 눈을 깜빡이며, 린징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한 거지? 루비싱의 귓속으로, 다시 TV의 소음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 예전에는 곧잘 나를 형이라고 불렀잖아. "
" ...그랬지? "
" 노래 취향도 꽤나 바뀐 모양이던데. "
" ....그렇기는 하지. "
6년이 지나는 동안, 루비싱에게서 바뀌지 않은 것은 순애보 뿐이었다. 신체는 물론이고, 음악 취향과, 호칭도 바뀌었다. 하지만 린징헝에게 있어서 이런 것은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편지로 대화를 나누며 루비싱의 말투가 조금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은 했으나, 린징헝의 머릿속에서 루비싱은 아직까지 6년 전 중학생인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루비싱은 긴장이 탁 풀려서,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 6년이나 지났잖아. 6년이면 애가 유치원에 들어갈 시간이라구, 징헝. "
" 넌... 애가 아니잖아. "
" 흠. 그럼 형 소리가 듣고 싶은 거야? "
" 딱히 그런 건 아니야. "
" 진짜? "
루비싱은 린징헝에게로 몸을 숙여오며 애교스럽게 물었다. 린징헝은 그런 루비싱의 행동에 살짝 몸을 뒤로 물릴 수밖에 없었다. 편안함을 되찾은 루비싱의 행동은 여유로웠고, 능청스러웠다. 형의 옆자리에 앉아 무릎에 이마를 찧던 귀여운 모습은 알코올처럼 어딘가로 증발해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지금의 루비싱이 귀엽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고... 린징헝은 다른 사람이라면 얼굴을 붙잡고 뒤로 밀어냈을 것을, 앞에 있는 이가 루비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저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루비싱은 피실피실 웃음을 흘리며 린징헝에게 말했다.
" 형! "
린징헝은 그 순간 루비싱의 어깨를 콱,하고 잡아챘다.
루비싱은 갑자기 어깨를 붙잡혀 밀린 탓에 바닥을 짚은 손을 떼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살짝 당황하여 린징헝을 바라보았다.
" 징헝? "
" 너... "
Playback > >11.08.FRI. PM 2:47
서류를 한참 넘겨보던 린징헝은, 무언가 생각난듯이 손목에 휘감겨져있는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린징헝의 오피스는 샌 카를로스에서는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루비싱의 귀가에 맞추려면 일찍 나서야만 했다. 린징헝은 보고있던 종이 뭉텅이를 대충 모아 파일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린징헝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테이블에 앉아있던 팀원들의 시선이 모두 린징헝에게로 모였다.
" 먼저 일어나지. "
린징헝의 이른 귀가는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팀원들이 살짝 놀라 엉거주춤 일어났다. 퇴근하시게요? 부하직원인 엘리자베스 투란이 어기적거리며 묻는 것을, 린징헝은 시니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다.
" 집에 무슨 일이 있으신가봐요? "
" .... "
린징헝이 퇴근하면 부하직원들은 대개 뒤이어 퇴근했기에, 투란은 속으로 탄성을 내지르며 슬금슬금 퇴근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투란의 목소리에 숨길 수 없는 들뜸이 드러나있었다. 그것은 다른 데스크에 앉은 이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났다. 린징헝은 그런 그들을 쭉 훑어봤다. 그의 무미건조한 시선에 투란은 왠지 오한이 들어 괜히 물었나,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대충 영업미소를 지어보이며 꾸물꾸물 몸을 움직였다. 외투를 챙긴 린징헝은 귀찮은듯 대답했다.
" 같이 사는 사람이 있는데, 오늘 같이 넷플릭스를 보자고 해서. "
린징헝의 대답에, 투란은 잠시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그녀의 커다란 눈이 당황스럽게 크기를 키웠다. 기실 투란만이 그런 것이 아니었다. 둥그렇게 눈을 뜬 부하직원들이 저마다 당황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린징헝은 갑자기 오피스의 분위기가 미묘해지자 눈썹을 찌푸렸다. 저들끼리 눈빛을 교환하는 게 퍽 이상했다.
" 왜? "
린징헝의 물음에, 투란은 당황스러운듯 손바닥에 묻은 땀을 청바지 위에 닦았다. 린징헝의 눈치를 보니 '넷플릭스'에 대해 아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근데 이걸 말해도 되나?? 그 의미가 아닐 수도 있...지 않지. 너무 노골적이지. 평소 행실이 쌩날라리가 따로 없는 투란도, 이런 말을 상사 앞에서 주워섬기기는 골이 아찔했다. 투란의 우물쭈물대는 모습에, 린징헝이 미간 사이를 좁혔다. 곧 불호령이 떨어질 듯한 그 모습에, 그녀는 마지못해 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넷플릭스를 같이 보자는 게 ...
11.08.FRI. PM 3:30
린징헝은 운전을 했다.
그가 모는 차의 창 너머로, 탁 트인 다운타운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운전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행위지만, 운전을 하다보면 때로는 잡생각이 덜어질 때가 있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리프레쉬를 위한 드라이브를 나가기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지금, 린징헝의 머릿속은 꽤나 복잡했다. 이유는, 오피스를 나오기 직전 부하직원들에게 들었던어떤 말때문에.
린징헝은 괜한 생각이라는 마음에 고개를 내저었다가도, 다시금 머릿속을 불쑥 뒤집고 들어오는 어떤 생각에 운전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넷플릭스를 같이 보자는 말의 뜻이....
넷플릭스를 같이 보자는...
투란의 말이 린징헝의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팝업창처럼 둥둥 떠다녔다. 린징헝은 갑자기 울컥 짜증이 나서 창문에 얹은 팔로 골을 짚었다. 그에게서 짜증스런 오오라가 풍겼다. 아마 투란이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언제가 자신의 사형날짜가 될지 가슴을 졸였을 것이었다.
생각을 해보자면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루비싱이 왜 자신에게 그런? 루비싱은 항상 귀엽기만한 동생이었는데? 중학생 시절에도 항상 새싹같은 플러팅을 쳐왔던 루비싱이 듣게된다면 대노할 생각이었으나, 린징헝은 린징헝일 뿐이었다. 집을 향하는 한시간이 굉장히 느릿하게 지나갔다. 린징헝의 생각은 더욱 더 깊어져만 갔다.
며칠 전의 일이 떠오른다. 그 날, 가지고 갈 것이 있어 잠깐 집에 들렀던 린징헝은, 소파에 걸쳐져있던 루비싱의 외투를 보고는 옷을 가져다놓으려 그의 방에 들어갔었다. 루비싱이 지내게 된 이후로 린징헝이 그 방에 들어간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루비싱의 방 안은, 린징헝의 향과 비슷한듯하면서도 다른 느낌의 향을 풍겼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을 때는 삭막하기만 했던 방이 사뭇 다르게 보이자, 린징헝은 괜히 방 안을 한 번 둘러보았었다. 그 때 보게 된 것이었다. 책장에 꽂힌 여러 음반들을.
루비싱이 원래 이런 노래를 들었었나?
대중음악과도 친숙하지 않은 린징헝이 헤비메탈의 세계를 접해봤을 리는 만무했다. 어딘지 거뭇한 오오라를 풍기는 앨범들을 쭉 훑어보던 린징헝은, 맨 오른쪽 한 켠에 꽂혀 있는 저스틴 비버의 앨범을 발견했다. 루비싱에게 보이프렌드는, 그의 기나긴 짝사랑의 역사에서 꽤나 의미가 큰 앨범이었기에 취향이 바뀌었음에도 창고로 치워지지않고 책장의 맨 오른칸을 사수할 수가 있었다. 훌쩍 커버린 루비싱을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하게, 린징헝은 유독 이질적인 그 앨범을 보며 그가 더이상 그 때의 중학생이 아니며, 그 때와는 사뭇 다름을 느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 일이 왜 지금 떠오르는 거지.
린징헝은 '더이상 어리지 않으며', '어린 시절과 많이 달라진' 루비싱 덕분에 사고가 단단히 얽혀버렸다.
린징헝은 주차를 하고 집에 들어서면서도 의아해했다. 원래 사람은 크면... 형과 자고 싶어하나? (그럴리 없다.) 루비싱이 자신을 좋아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다. 린징헝은 루비싱이 들뜬 얼굴로 집에 들어서는 것을 보며, 당황스러운 추리를 더더욱 그만 둘 수 없게 되었다.
루비싱이 나와 자고 싶어하나?
린징헝의 시선은 TV에 고정되어있었지만, 그는 드라마를 전혀 보고있지 않았다. 루비싱은 그와 자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야기나 좀 나눠보려한 것 뿐인데. 가까이 앉은 두 남자의 동상이몽은 시리즈가 중반을 향해 달려감에도 멈추지 않았다.
물어보자.
린징헝은 결정했다.
약간 이상하기는 하지만, 사고의 흐름이 진전되지 않는데 질문 이외의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인가? 그리고 린징헝은, 결정한대로 물어봤다. 왜 이제 나를 형이라고 부르지 않아? 물론 본질문은 이게 아니었다. 그저 '너 혹시 나와 자고싶니'를 물어보기 전, 예열 차원으로 던진 질문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 형! '
이런 반응으로 돌아올 줄은 몰랐지.
린징헝은 제게 웃으며 붙어오는 루비싱의 얼굴을 보며,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11.08.FRI. PM 9:59
루비싱의 어깨를 붙잡은 린징헝이 그에게 물었다.
" 너, 나를 좋아해? “
11.08.FRI. PM 10:00
루비싱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린징헝이 자신의 사고의 흐름에서 모순이 되던 곳을 발견해버린 것이다.
루비싱은 잠시 석상처럼 딱딱히 굳어버렸다가, 이내 자신의 어깨를 붙잡은 린징헝의 손목을 붙잡았다. 루비싱의 귀밑이 새빨갛게 불타올라오고 있었다.
" 어떻게 알았어? "
루비싱의 무릎위에 있던 나초가 한가득 담긴 그릇이, 그의 움직임에 소파 아래로 떨어져버린다. 작지않은 소음 이후에는, 바닥이 살사소스와 나초로 난장되어있었다. 6년만의 짝사랑을 들켜버린 소년의 얼굴은, 마치 엎어진 살사소스처럼 새빨간 색을 띄고 있었다.
린징헝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벌렸다. 루비싱과 린징헝의 사이에는, 아수라장이 된 TV 속 드라마의 시끄러운 사운드를 제외하고는 어떤 소리도 없었다. 루비싱은 그대신, 쿵쿵거리는 제 심장 소리를 들었다. 놀라운 것은, 린징헝의 심박수도, 그 못지않게 높았다는 것이었다. 이상한 침묵 끝에, 린징헝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니까, 루비싱, 너...
♬♪♩!!!
우와아악!! 루비싱은 돌연 제 등 뒤에서 울리는 벨소리에, 깜짝 놀라 린징헝에게로 엎어졌다. 린징헝은 얼떨결에 제게로 엎어지는 루비싱을 받듯이 안았다. 어쩌다보니 방금 짝사랑을 고백하게 된 루비싱과, 고백을 받게 된 린징헝의 시선이 동시에 소리가 울리는 쪽으로 향했다.
[ 아빠 ]
벨소리가 울린 것은 루비싱의 핸드폰이었고, 벨소리를 울린 장본인은 루비싱의 부친, 루신이었다. 그 자리에서, 6년 전과 다름 없는 것은 린징헝과, 루비싱의 마음과, 루신의 한결같은 산통 브레이크 뿐이었다. 루비싱은 핸드폰을 멍하니 보다가, 속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또? 이번에도 또, 루신으로 막이 내려질 것인가?
오늘은 이렇게 안 끝내!
루비싱은 핸드폰으로 향했던 고개를 린징헝에게로 돌렸다. 얼떨결에 폭 껴안은 모양새가 된 두 남자는 지나치게 거리가 가까웠다. 루비싱은 화상을 입은 듯 새빨개진 얼굴로, 상체를 일으켜세웠다. 루비싱이 몸을 일으키자, 린징헝은 뒤로 소파를 짚는 수밖에 없었다. 루비싱과 린징헝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하고, 루비싱은, 살짝 떨리는 입술새를 벌렸다.
" 내가 좋아한다고 하면, 받아줄거야? "
루비싱의 목소리는, 떨리며 열리던 입술만큼이나 잘게 떨리고 있었다. 린징헝은 그 모습에서 6년 전 제 무릎에 고개를 찧던 루비싱이 생각났다. 여전히 핸드폰은 시끄럽게 울리고 있었고, 드라마는 한창 클라이맥스를 향하고 있었다. 엎어진 살사소스와 나초, 그리고 저를 내려다보는 루비싱... 어지러운 상황이었다. 그 속에서 혀로 입술을 축이던 린징헝이 대답했다.
" ( ). "
이제는 심화편으로
쿵쿵.
쿵쿵쿵.
쿵쿵!!
주말 오전 11시 34분.
점심이 다 되어가도록 침대이불 속에 푹 누워있던 루비싱은, 귓전을 괴롭히는 둔탁한 소음에 눈살을 찌푸렸다. 가정집의 냄새가 물씬 나는 그의 방 안은, 얇은 소재의 커튼이 쳐져있었다. 아침에 창문을 넘어 내리쬐는 햇빛에 루비싱이 대충 손만 뻗어 쳤던 것이었다. 한참을 꾸물대던 루비싱은 찰나의 고민을 했다. 그냥 무시하고 계속 잘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너무나 끈질겼다. 루비싱은 부은눈을 반 정도 뜬채로 비척비척 일어나 방을 나섰다.
불투명한 겉문 너머로 보이는 실루엣은 누가봐도 풍채가 좋은 남자의 것이었다. 남자는 아직도 문을 두드리고 있었는데, 점점 쿵쿵이 아니라 쾅쾅,의 수준으로 내려치고 있었기에 루비싱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영화로운 주말 아침(점심이었다.)에 이게 무슨 행패야. 루비싱은 침대에 일어난 그대로(-헐벗은 채로-) 현관을 향하려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쇼파에 아무렇게나 늘어져있는 트레이닝바지와 얇은 니트를 주워 몸에 꿰었다. 캘리포니아의 남자가 되었기로서니 자신의 신체를 아무에게나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다.. 니트는 루비싱의 몸집보다 살짝 커서, 품이 살짝 남아돌았다.
" 나갑니다, 나가요. 나간다구요... 누구세.. 음? "
루비싱이 느긋하게 옷까지 꿰어입고 나갈 동안, 밖에 서있는 남자는 어지간히도 마음이 급한 모양이었다. 루비싱은 까치집이 된 개털머리를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문을 열었다. 누군데 내 홈스윗홈의 문을 이렇게 험상궂게 두드리는 걸까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문을 연 루비싱은, 반쯤만 떴던 눈의 크기를 이내 최대치로 키우는 수밖에 없었다. 문 앞의 남자는, 그가 감히 상상치도 못한 인물이었다.
" 루비싱, 너, 이...! "
" ??? "
" 쌍놈의 새끼야! "
다짜고짜 욕을 얻어먹은 루비싱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멍청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빠??
" 누가 니 아빠야! "
" 아이 또 왜그래요? 언제 여기에 왔어요? "
" 그게 중요해?! "
문앞에 서있는 남자는, 루비싱의 말그대로 그의 '아빠'였다. 물론 그는 루신과는 퍽 다른 사람이었다. 일단 루신과는 행동력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였다. 루비싱이 전한 그의 '연애'소식에, 루신은 그저 '하하'하며 메시지만 하나 보냈으나, 이 남자는 9000km를 넘어 14시간의 비행을 하고 여기까지 직접 행차를 한 것이었다. 루비싱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당황을 금치 못했다. 노발대발하는 남자의 고성을 멀뚱히 듣고 있던 루비싱은,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 진짜로 내가 연애한다는 얘기 듣고 여기까지 찾아온거에요?? 정말로? "
루비싱의 대부, 독안응은 그의 입에서 '연애'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얼굴을 시뻘겋게 달구었다. 너.. 이... 그는 혈압이 오르는듯 뒷목을 짚었다. 효자 루비싱은 그 모습이 걱정되었다기보다는... 약간 웃겼다. 하지만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은 루비싱이 은은한 미소만을 얼굴 위로 띄웠다.
" 커피라도 내려드릴까요? "
" 너 그 놈이 뭐하는 놈인줄은 알아?? "
" 사위될 사람한테 그놈이라고 해도 돼요? "
" 미쳤어?! "
독안응의 절규어린 비명이 체리스트리트를 울렸다. 루비싱은 이쯤되니 신고가 걱정되어, 한손으론 귀를 막고 한손으로는 검지를 치켜올려 입술에 대었다. 아빠! 너무 시끄러워요! 여기 사람들 신고도 잘한단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루비싱의 눈빛에는 진심으로 걱정이 배어있었다. 효자 납셨다. 효자 납셨어. 독안응은 열불이 터지다못해 어이가 없었다.
그때였다.
" ...루비싱, 누구야? "
루비싱의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루비싱과 독안응이 누가 먼저랄것없이 집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루비싱은 자신의 뒤에 서있는 남자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 징헝! 일어났어? 손님 왔어! "
그렇다.
루비싱과 린징헝은 결국 연애에 성공하게 되었고, 루비싱의 6년의 짝사랑의 끝을 맺었다. 그것이 벌써 7개월 전의 일이었다. 루비싱의 폭신한 침대에 같이 누워있던 인물은 린징헝이었다. 린징헝은 현관에서 들리는 소음에 잠에서 깬듯, 루비싱과 별반 다르지 않은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루비싱은 린징헝의 맨팔뚝에 팔짱을 걸며 독안응을 바라보았다.
잠깐, 맨팔뚝?
" 너, 린, 린징헝.. 너... "
루비싱이 린징헝의 니트를 홀랑 훔쳐 입은 덕분에, 린징헝은 트레이닝바지만 챙겨입은채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의 상반신은 내추럴함을 가감없이 뽐내고 있었다. 문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린징헝의 탄탄한 상체를 비춘다. 이제 독안응의 미래를 점쳐보자. 그는 곧 거품을 빼어물게될 확률이 농후했다...
다큰남자둘이맨몸으로침대에같이누워있을일이뭐가있는데..
글쎄. 넷플릭스라도 같이 본 모양이지.
경험론적짝사랑가이드 ~입문편~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