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불




제8성계 베이징 베타성, 그 안의 '낡은 술집'은 -비록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이징 스타를 제집 앞마당으로 삼고 있는 깡패집단 '블랙홀'의 주둔지이자 휴식처였다.

그 곳의 숨겨진 사장인 '린 4형'이 출타한 지금.

낡은 술집에는 두 남자와 한 여자만이, 은은히 떠도는 재즈 음악을 배경으로 한가로이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짙은 색소폰의 음색이 지직거리며 깨져 불협화음을 자아내던 때, 평화는 문을 넘어트리고 달음박질치며 들어온 사람에 의해, 가볍게 깨져버렸다.

"리, 린!"

남자는 숨을 몰아쉬며 겨우겨우 한 글자만을 토해냈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갈빛 정장이 이리저리 구겨지고, 아침부터 세팅한듯한 옆머리가 이리저리 날렸다.
린은 뛰어 들어온 남자의 행색을 보고도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무슨 일이지?"

남자가 숨을 헙 들이켰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이 흘러내렸다.

"미안하지만 도와줘요! 후난 로 골목길에서..."

잔루는 그 모든 이야기를 듣는 내내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폭력, 상해, 납치 등등으로 가득한 이야기는 듣기 편안한 것은 아니었기에 린 4형의 표정은 뒤틀렸다.
크게 개의치 않는 듯 잔루는 익숙하게 기계 팔로 변해 들러붙고, 코트를 펄럭이는 린4형의 옷자락에 가려졌다.

거친 숨을 거듭해서 몰아쉰 루비싱은 뛰는 심장을 주먹으로 문댔다. 페니가 내주는 물을 마시며, 루비싱은  린징헝의 오른팔-뒷모습-을 아련하게 쳐다보았다.
물컵을 내주던 페니가 4형의 눈치를 보더니, 몰래 엄지를 치켜들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그의 귓가에 얼굴도 눈도 없는 기계 팔의 목소리로 환청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연기에 천재적인 재능이 있으십니다, 선생님.', 이라고...

*

"린이 기분이 꽤나 안 좋아 보이네."

그러니까, 그 날의 대화는 루비싱의 첫마디로 시작되었다. 여느 때처럼.

"그렇습니까?"

잔루는 여상하게 대답했다. 루비싱은 잔루를 흘겨보다가, 닫힌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보이지 않아?"

잔루는 루비싱의 시선을 좇지 않았다. 오늘 아침, 잔루는 린징헝의 상태를 분석했었다. 그는 평소와 같이, 통계적으로 평소와는 별 다를 바 없었다. 잔루는 대부분의 물체들 상태를 구분할 수 있으나, 여전히 구분할 수 없는 -남자와 여자의 특징, 감정의 미묘한 차이 등- 것이 존재했기에, 이번의 답도 애매하다:

"모르겠습니다."

루비싱은 다시 발랄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왜 기분이 안 좋은 걸까?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제가 파악하기로 선생님의 최근 일정에 특별했던 일은 없습니다. 이번 주는 베이징 스타가 무법지역인 것을 감안하고도 꽤나 평화로운 주 였던 것으로 사료되고.... 아, 그러고 보니 내일모레가 선생님의 생일이군요."
.
.
.
루비싱이 삐걱거렸다.

"뭐?"

잔루는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내일은 신성력 273년 10월 31일. 모레는 11월 1일이며, 그 날은 린 선생님의 -"
"잔루!!!!!!!!!!!!!!!!!!!!"
"...생일입니다."

루비싱의 조곤조곤한 음성이, 60 데시벨을 가볍게 초과할 크기로 쩌렁쩌렁 울렸다. 소리를 왁 지른 루비싱은 심지어 제풀에 제가 놀라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어떻게 그런 중요한 사실을 말, 말하지 않을 수가 있어?"
"묻지 않으셨..."

악!!!
낡은 술집에 울려 퍼지는 루비싱의 고성에, 창고에서 세쌍둥이들과 박혀있던 페니도 눈을 잔뜩 찌푸리며 나와 말을 보탰다.

"뭐야, 무슨 일인데?"
"페니, 당신은 알고 있었어요?"

평소보다 다섯 배 정도는 흥분되어 보이는 루비싱의 모습에 페니의 눈썹이 절로 올라갔다. 전혀 궁금하지 않았지만, 예의상 물어봐달라고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모습에 페니는 어영부영 답했다.

"음? 뭐를?"
"내일모레가 당장 린의 생일인 거요!!"
"뭐?"

페니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루비싱만큼 고조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루비싱이 억울한 목소리로 토로해도 그는 어깨를 으쓱이다 팔짱을 낄 뿐. 잔루 또한 그렇다.

"페니 아가씨께서 물어보셨다면 진작에 답해드렸을 겁니다. 4형은, 딱히 이 사항에 대해 언급을 금지하지 않으셨습니다."
"묻지 않는 게 당연하지, 4형은 차치하고, 네가 알고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으니까!"

언성이 높아지고, 일방적인 감정이 격해질 기미가 보이자 루비싱은 재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학생들을 대하듯 손뼉을 두 번 쳤다.

됐어요! 조용!
탕! 바 테이블을 치는 소리가 모두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생일 파티,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요!"

뭐?

*
그래서 과정은 어찌 됐든.
있지도 않은, 블랙홀과 어린이들을 위협하는 악의 범죄조직을 처단하러 위대하신 블랙홀의 린 4형, 아니 린징헝이 베이징 스타의 후난로 까지 강림하신 것이 되시겠다. 잔루는 시간을 끌어 생일파티를 준비하는 동안 린징헝이 낡은 술집으로 돌아오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맡았고, 나름...

"여기가 맞나?"

"루 선생님이 불러주신 좌표에 의하면 이 곳이 맞습니다."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아마.

린징헝은 한층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골목길을 샅샅이 훑었다. 노숙자들이 거리에 주저앉아있고, 쓸데없이 높은 데다 낡은 건물들에 태양이 가려져 어둑어둑한 것을 빼면... 8성계의 골목은 조용했다.

그야, 정말 아무 일도 없고, 없을 테니까.

오늘 잔루의 임무는 루비싱이 약속한 베이징 성 기준 7 PM 까지, (현재 시각은 3시 였다) 그의 선생님을 어떻게든 바깥에 잡아두게 하는 것이었다.
잔루는 텅 빈 골목을 일별하는 린징헝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현재 시각은 3시 4분 25초-27초. 낡은 술집으로 돌아가는 시간 (대략 24분) 을 포함해도 상당히 많은 시간이 남아있었다.
잔루는 오전에 있었던 일-소동-을 생각했다.

4형의 생일파티를 한다고 ?

루비싱이 처음, 그러니까 정확히 29일 베이징 스타 기준 오후 6시 23분에 그 발언-생일 파티를 해요!-을 했을 때, 블랙홀의 일원들은 다들 냉정히 판단했다.
이건 마치, 연맹 대비서관이 8성계 개혁계획을 추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4형에게 상당한 인간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는 페니마저 회의적이었다. 린 4형의 이미지란, 철 지난 영화에 나올 법한 철혈의 독고다이 알파울프메일- 정도였기 때문이다. 4형이 생일파티를? 이거 그거잖냐, 험상궂은 폭주족에게 요정 공주 옷 입히기.
그럼에도 루비싱은 꽤나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생일은 어차피 별거 아니잖아." 페니가 말을 이었다.

"뭐 특별할 거 있어? 살기 바빠 뒤지겠는데..."

입안에 있던 껌을 질겅질겅 씹는 바람에 발음이 샜다. 페니는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성계에서는 가르치겠지, 생일은 행복하고 어쩌고저쩌고. 근데 뭐 어쩌라고, 여긴 망할 8성계라니까."

루비싱 또한 아는 사실이다. 4형은 실제로 루비싱과 만난 이래로, 단 한 번도 생일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매일이 같은 날인 것 처럼 보낼 뿐이었다. 그의 삶에는 어떠한 특별한 기쁨도, 슬픔도 끼어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포기할 리 없는 우리의 루비싱은 꽤나 긍정적인 모습으로 대답했다.

"내 욕심일까요?"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욕심인 것이 맞았다.

"하지만 축하해주고 싶은걸요. 세상에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축하해달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축하받지 않기를 원한다고도 말한 적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나는 해주고 싶어요. 그가 기뻐하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내 욕심인가 싶어요. 그가 외롭지 않게... 루비싱은 그렇게 말했다.

생일을 축하받지 않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라고 말하는 듯한 반짝이는 눈앞에서, 호기롭게 아니다-지껄일 용자는 블랙홀에 없었다. 페니는 험상궂은 깡패새끼들 앞에서는 실컷 비웃으며 칼을 놀릴 자신도 있었지만, 저런 눈앞에서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씹던 껌을 대충 삼켜내고, 페니는 웃었다.

"어쩔 수 없지."

페니의 말이 떨어지자 루비싱은 천군만마를 얻은 조조 마냥 보이지 않는 꼬리를 붕붕 흔들었다.

"그러니까 너도 도와줘야겠다, 잔루."

그렇게 된 일이다.

*

린징헝은 여전히 거리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잠시 잔루를 의심쩍은 눈빛으로 바라보았으나, 다시 고개를 돌리고 자신이 놓친 것이 있나 둘러본다. 잔루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의 린 선생님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생일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가끔 11월 1일이 되면, 자신의 여동생의 생일을 기념하듯 잠시 자신의 담배에 켜진 불빛을 오래도록 바라볼 뿐이다. 그의 태어난 날은 여느 날들과 같다. 그렇다면 괜히 소란을 피울 필요가 있겠느냐. 그것이 린징헝의 방식이었다. 잔루도 오래도록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잔루는 루신을 생각했다. 평소라면 루비싱의 모습에서 루신의 족적을 그리는 것은 린징헝이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잔루는 루신과 닮은 루비싱을 생각했다. 확실히 다른 모습이다. 이 둘이 닮았다면, 페니와 신호등 형제 맏이는 친남매일 것이다. 유전자는 이미 검색했다. 한 번 맞지 않은 유전자는 맞을 리가 없다. 루비싱의 아버지인 독안응이 루신 장군의 성씨를 이어받았기에, 루비싱의 이름은 루비싱이다.
그렇게 된 일이다.

그러나 잔루는 그 순간 루비싱에게서 루신의 파편을 보았다. 그 성격 다른 웃음이 어쩐지 유사한 것은 착각일까. 분석도가 떨어졌나. 잔루는 다시 생각한다. 지워졌다고 생각했으나 사실 아니었던 폴더에서 다시 기억을 열람하듯, 오래된 빛바랜 사진에서 선명한 선의 궤적을 그리는 것처럼.

"선생님."

잔루가 물었다. 단조로운 목소리가 귀에 닿도록.

"왜 그래?,"

부스스한 갈빛 머리가 고개를 돌리자 흔들렸다.

*


"잔루."

루신이 미소 지었다. 입가에는 아직도 완벽하게 씻겨나가지 않은 생크림의 일부가 묻어있었고, 머리에는 폭죽과 반짝이 조각이 스멀스멀, 그가 머리를 흔들 때마다 공중으로 작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와 걸맞지 않는 무균 기포와 마이크로 로봇은 서로 기이한 그림을 만들어냈다. 잔루가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부상의 강도가 상당히 심했습니다. 거동에는 문제가 없으시겠지만, 앞으로 3시간 정도 안정을 추천해 드립니다."

"...다음에 회의가 있지 않나?"

"그렇습니다. 10분 후에 독안응 선생님이 모시러 온다고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쉬는 시간을 주고 말해, 주고. 루신이 투덜거렸지만 잔루는 안정을 취하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러나 부상이 심각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8시간 전. 성간해적의 기습으로 인해, 루신은 먹던 닭고기 수프도 내팽개치고 기갑을 몰아야 했다. 잔루의 본체가 아닌 소형 기갑을 이용한 전투는 6시간이 넘도록 지속되었고, 자정을 넘어선 새벽에야 겨우 끝났다. 심각한 부상을 입어, 고대 지구였다면 사망했을 루신은 다른 부상병들과 부대껴 의료실로 실려갔고, 의료실의 침대에서 온 몸이 무균 기포에 뒤덮여 깨어났다.
그리고 루신이 눈을 떴을 때, 잔루는 조금 기이한 광경을 보게 된다.

"...하나, 둘, 셋,"

누가 봐도 병자의 행색인 루신. 그리고 그를 안쓰러운 얼굴로 보는 사람들. 사람들은 그의 침대 곁에 마치 의식을 하는 것처럼 빙 둘러 섰다. 분위기를 내려 의료실의 조명이 꺼지자, 조잡한 생크림이 발라진 케이크 위에 꽂힌 짧은 촛불이, 미처 다 닦아내지 못한 울음의 흔적을 일렁일렁 비춰냈다. 그들 모두가 필사적으로 웃음을 끌어내려 했기에, 루신을 제물로 부두의식을 지내려는 8성계 변두리의 조직모임 같기도 했다.
두껍게 둘러맨 붕대, 아직도 상처 위에 올라타 부위를 꿰매는 작은 로봇 등이 조그만 웅웅 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그들은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빛 하나를 루신에게 내밀었다.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고 깜짝파티가 끝난 이후, 잔루는 루신이 초를 불기까지의 장면을 테이프를 되감듯 회상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군요."

루신은 쾌활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야 그렇다.

"...제가 검색한 생일의 개념과는 좀 달라서 당황했습니다."

잔루가 사색에 잠겼다. 루신은 잠시 움직이지 않는 최첨단 인공지능을 바라보았다. 저 머릿속 회로에서 어떤 무수한 정보들이 확인되고 있을까? 그는 갑자기 궁금해져서, 참지 않았다. 몸이 81조각 정도로 부서져도 그 놈의 호기심은 조금도 부서지지 않았다.

"네가 검색한 건 어떤 이미지지?"

루신의 눈이 잔루의 푸르고 고요한 렌즈를 응시했다. 웃음 짓지 않는 그의 눈은 별처럼 반짝이던 호기로움이 깊은 바다로 가라앉은 듯했다. 잔루의 렌즈에 여러 그림자들이 스쳐 지나갔다.

"키워드로 < 행복 >,< 축하 >,< 생일 >이 붙은 이미지들입니다. 풍선도 있고, 유니콘... 아마 피냐타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케이크 등이 나오는 군요."

오? 라며 이상한 소리를 내던 루신은 하하! 라는 웃음을 터트리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잔루의 대답 무언가가, 잠자고 있던 루신의 장난꾸러기 같은 소년 하나를 깨워버린 모양이었다. 무균 기포가 슬렁슬렁 날아가는 속도에 맞춰 발을 파닥파닥 거리던 루신이 기지개를 쭉 폈다.

"잔루. 너는 따지자면 보토에서 태어났지..."

잔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신이 말을 이었다.

"보토에서 보던 경치와 8성계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점차 네 데이터베이스에 맞지 않는 이미지들을 부합시키려고 해야 할 거다. 뭐, 시간이 지나면 보토의 정보보다 8성계의 정보와,  날들이 점점 더 익숙해질 거고.  제8성계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태어난 날이건, 기념일이건 모두 살아가기에 바쁘지."

그의 시선은 어딘가 먼 곳을 보고 있는 듯했다. 항상. 잔루는 아마, 루신이 자신의 보토에서 보내던 삶을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곳에 온 이유는 그거야,

그래서 내가 이 곳에 온 거야, 여기서 보내는 생일과 그 곳에서 보내는 생일이 크게 다른 점이 없게.
기약을 입에 담는 루신은 생명력으로 쾌활하다.
"이 곳도 충분히 번화할 수 있어. 시간이 좀 오래 걸리겠지만?"

"살기 바쁘다고 해서, 가난하다고 해서, 이 특별한 날을 어영부영 보내란 법은 없지. 그러면 사람이 삭막해지기만 한다고. 이게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잔루, 기억해둬."

루신은 극적으로 검지를 세워 잔루의 앞에 들이댔다. 효과음으로 빠밤! 을 넣는다면 괜찮지 않았을까?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에 떨어진 글리터가 반짝반짝 날려, 특수효과를 자아내는 것 같았다.

"지나쳐도 될 것 같은 사소한 인사, 축하들이 생을 지탱할 기억이 되기도 한다고.

잔루. 나는 너와 함께 지켜볼 8성계의- 발전될 생일파티들이 기대된다.

루신은 그렇게 얘기하고는 잠시 뒤에 들어온 병사와 작전회의를 떠났다. 그 날 저녁, 또다시 거대한 성간해적과의 접전이 있었다. 생일이라도 기쁜 일만 있지는 않았다. 생일은 별다를 게 없는 날이었다. 그 이후로는 더 이 주제와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었고...

그리고 루신은 죽었다.
매년 돌아오는 생일을 두 사람이 모여 기념할 수 없었다.

*

그런데도 잔루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 기억은 아주 오랫동안 메모리에 저장되어있을 것이라고 잔루는 판단한다.
잔루는 린징헝이 루신과 같이 보내지 않은 생일을 생각했다. 많은 것을 잃은 이후의 생일을 생각했다. 5년의 삭막했던 나날 중, 특별해야 했었던 날들을 생각했다.
그는 항상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듯 살았다. 4형은 블랙홀의 우두머리였고, 그런 고독함과 맞물려있는 사람은 평생을 외로이보낼 것만 같아 잔루는 홀로 린징헝의 생일을 축하했다. 그만두라는 명령을 받고는생일의 생자도 꺼내지 않았지만. 잔루는 1년에 한 번씩 답이 필요하지 않은 질문을 생각한다.

그는 어떠한 기억으로 평생을 지탱해 살아갈까?

저렇게 고독하고 아득한 정상에 서서 살아가는 사람이. 잔루는 궁금해했지만 그 이상을 파고들지는 않았다. 그 이상을 넘볼 수는 없으니.

...린징헝은 여전히 쓰레기통을 넘보다가, 의심쩍은 눈길로 입을 뗐다.

"아무것도 없는데."

"...아직 저 쪽은 보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만."

린징헝은 이쯤 되면 놀아나는 것도 적당히 해줬다고 판단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한숨을 토해내듯 말했다.

"이봐, 잔루. 넌 내 기갑이야. 제대로 대답하도록. 루비싱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지?"

잔루는 부정하지 않았다. 루비싱이 서프라이즈 파티를 말하지 말라고도 했으나, 잔루의 주인은 린징헝이다.

"네, 그렇습니다."

"....못 말리겠군."

"지금이라도 연락해서 그만두라는 연락을 드릴까요?"

잔루는 주인의 명령을 존중할 의사가 있었다. 아니, 의사라고 하기에도 그러한가. 그러나 잔루는 생각한다. 만약 린징헝이 실제로 연락을 하라고 한다면 많이 아쉽다는 말을 덧붙일 것이라고.
그러나 의외로 린징헝은 조용했다. 잔루는 혹시나 그의 주인이 귓구멍이 막혔을까봐, 다시 한번 말을 반복했다.

"연락을 드릴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린징헝은 미리 돌아가겠다거나 라고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하늘을 한 번 보고, 어두운 골목길 중간에 부러질 듯 서 있는 낡은 시계를 바라보았다. 현재 시각은 5시 28분. 해가 빨리 지는 탓에 어둑어둑한 골목길은 오래 머무르기에는 알맞지 않았다. 가로등 불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예정된 시간은 몇 시지?"

"정확히 7시에 모시고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기다리지-"

라고 한 순간.

닌자가 나타났다.

복면을 쓰고, 옆구리에 칼과 엉엉 우는 아이를 낀 닌자가, 린징헝과 잔루를 곤란한 시선으로 오도 가도 못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
잔루는 복면 사이로 드러난 인상착의를 순식간에 녹화하고 분석했다. 닌자는 그 자리에 굳어서, 미세한 식은땀이 배어 나오기 시작할 무렵 즈음에-
바라보기 안쓰러울 수준의 속도로 골목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잔루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 교장님이 말씀하신 분은 아닌 것 같지만."

린징헝은 골치 아픈 표정으로 잔루를 노려보았다. 잔루는 상처받지 않았다.

"어쩔까요?"

"......쫓아."

*


소탕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4형과 잔루 둘이서 처리하기에는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맞닥뜨려, 예상보다 시간이 늦어졌다. 잔루는 CCTV 로봇을 조작하며 루비싱에게 늦겠다는 연락을 보내야 했고, 어쩐지 순조롭게 돌아가나 했던 생일파티 계획이 틀어지자 루비싱은 오탈자까지 내가며 알겠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린4형과 잔루가 다시 술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시각이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바른생활 어린이 루 교장은 한 참 전에 돌아갔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역시 낡은 술집은 조용했다. 린징헝은 가로등 아래에서 고독한 남자처럼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잔루가 문을 연 순간.

펑!

그리고 온갖 색색의 폭죽이, 눈살이 찌푸려진 4형의 앞으로 쏟아졌다. (놀랍게도, 린징헝 장군은 수많은 전쟁에서 이보다 열 배는 눈부신 포격을 경험했기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루비싱이 케이크를 들고, 페니와 블랙홀의 신호등 형제, 그리고 잔루의 귀염둥이 도마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술집으로 돌아온 린징헝을 반겼다.
잔루는 문 옆에 서서 그의 미간이 점점 구겨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어두운 가로등의 불빛보다 더 밝은, 낡은 파주점의 싸구려 조명이 어둠에 익숙해진 린징헝의 눈에는 너무나... 지나치도록 눈부셨다. 루 교장이 쾌활하게 웃었다.

"린, 오늘 생일이라면서요?"

"...왜 여기에 있지?"

린징헝은 갑자기 들린 폭음에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당황한 것인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뜸 들여 동문서답했다. 그의 답이 루비싱의 흥미를 당겼는지 그의 표정이 점점 개구지게 변했다.

"잔루가 지나가다가 얘기를 해줬어요. 그래서 한번 .."

아니, 너 집에 가서 자야 하지 않아? 라는 말이 린징헝의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린징헝은 루비싱의 반짝이는 눈앞, 그의 면전에 대고 분위기를 깨는 말을 하기에는 눈치가 완전히 죽지 않았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든 거절의 말을 건네려는 순간, 루비싱이 선수를 쳤다.

마음에 들어요?
잔루는 린징헝의 뒤에서 입을 뻐끔거렸다. 나이스 타이밍. 린징헝은 또 한 번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고독한 사람이라도, 자신을 향해 내밀어 주는 손을, 그 부드럽고 상처없는 손을 내칠 수는 없는 편이다.

"얍."

루비싱이 케이크에서 맨 손가락으로 크림을 듬뿍 떠,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여우처럼 그의 코에 묻혔다.
일순 낡은 술집은 정적에 파묻혔다.
린징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페니도 숨을 들이켰다.
도마뱀과 잔루는 원래 조용하다.

루비싱은 자신이 해놓고도 지레 겁먹어버려, 손가락 끝의 크림을 보고, 린징헝의 뺨에 묻은 크림을 둘러보다 최대한 미남처럼 씩 웃었다.

그의 얼굴에 만화처럼 커다란 식은땀이 흘러내리려는 찰나, 린징헝의 입가로 옅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루비싱은 미소도 잊고 얼이 빠졌으나, 린징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페니를 향했고, 신호등 형제를 노려보다 마지막으로 루비싱과 그의 손에 들린 케이크에 닿았다.

타이밍을 재던 잔루와 루비싱은, 호흡이 척척 맞았다. 잔루가 낡은 술집의 조명 밝기를 스르르 낮추자, 루비싱은 한 손으로 케이크를 받치고 라이터를 꺼냈다. 찰칵, 하는 소리가 암흑 속에서 울렸다.

주위가 밝아지고, 어둠 안에 단 하나의 불빛이 일렁였다.
잔루는 그 모습을 쭉 보고 있었다. 오래 전 루신의 병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피워낸 케이크 위의 불꽃을 재생했다.
그것과 똑같은 불이, 그 따뜻한 오렌지빛 불빛이 린징헝의 얼굴에 부드러운 그림자를 자아냈다.

그의 주인은 오래도록 홀로 서 있었다. 저 정상에, 고대 지구의 눈보라 치는 설산의 정상에 서서 모든 것을 내려다 보고 있을 인물은 추위도 슬픔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얼굴에 따스한 불빛을 드리우고 있다. 잔루는 생각한다. 이런 일련의 행동들이, 언젠가 그가 주저 앉을 날에 삶을 지탱할 이유가 될까?

그는 정답을 내리지 못한다.
그저 루신을 생각한다.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 저 하늘의 불을 끌어온 사람을.
잔루의 생각은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는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음을 모사했다. 그는 언제나 린징헝의 안위를 생각할 뿐이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선생님."